햇빛이 너무 투명해서 도저히 집에 있을 수 없었던 토요일 아침,
나는 가벼운 차림으로 카페에 갔다.
바람은 비단처럼 얼굴을 부딪혔고, 희미한 산향기를 머금은 공기는 신선했다.
등에 햇살을 받으며 20분 남짓 걸었다.
어느 5월의 평화로운 아침 풍경 덕분에 모든 것이 완벽했다.
혼자여도 외롭지 않고, 누가 있어도 귀찮지 않은 순간이었다.
아침을 여유롭게 시작한 나는, 내친김에 동네를 한 바퀴 돌기로 했다.
눈부시게 빛나는 햇살이 가득한 아파트 단지 내는 어딜 봐도 초록이었다.
그런데 유난히 흰 바지가 둘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1학년쯤 되었을까? 남자아이 둘이 화단에 대고 절을 했다.
어라? 절을 하네? 싶었는데 다시 손을 모으고 땅바닥에 엎드렸다.
인적이 드문 토요일 오전, 나는 너무 신기한 모습에 다가갔다.
절을 두 번 마친 아이들은 잠시 머리를 숙이고 묵념을 하는 듯했다.
가까이서 보니 유독 하앴던 바지는 태권도복이었다.
뭐 하고 있었는지 묻는 내게 아이들은 "제사를 지냈어요."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 앞에 조잡한 문구점용 과자가 몇 개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오호 이 녀석들 봐라? 누가 묻혔을까?
궁금해하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아이들은 앞니가 빠진 잇몸을 훤히 드러내며 이야기했다.
"여기에 달팽이가 있고요, 저기에 새가 있고요. 저쪽에는..."
"지금 다 절하고 제사 지낼 거예요."
아파트 단지 화단 서너 군데에 그들이 의미 있게 묻어준 생명들이 있었다.
들으니 태권도 학원 행사 가는 길에 제사를 지내고 가기로 했다고.
아파트 앞 작은 마트에서 과자를 산 두 친구는 일부는 먹고, 일부는 제사에 썼다고.
달팽이를 언제 키웠는지, 어떻게 생겼고, 어쩌다 죽었는지, 그래서 어떻게 했는지,
죽은 새를 어디서 발견했는지. 어떻게 묻어주었는지 등등...
신나게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아이들의 표정은 상실의 슬픔보다는 추억의 기쁨이 컸다.
아이들과 한바탕 이야기를 하며 나는 깜짝 선물을 한 아름 받은 것 같았다.
사람이 이토록 사랑스러울까.
살았을 때 다른 존재들과 정을 나누고, 죽은 후 고이 묻어주고,
그를 기억하며 기뻐하는 모습이 얼마나 예뻤는지 모른다.
처음에 키우던 달팽이를 묻어주라고 어른들이 시켰다손 치더라도
생명이 다한 다른 동물까지 챙기라고, 그리고 제사까지 지내라 하진 않았을 텐데.
야무지게 하는 절도, 잠시의 묵념도, 어른들의 모습을 흉내낸 거겠지.
의외의 관심으로 약간 흥분했는지 코평수가 넓어진 두 아이는,
눈동자를 반짝이며 다음 목적지로 서두른다.
며칠 전의 새부터 작년 가을 잠자리까지 제사를 지내려면 시간이 없단다.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듯,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처럼
가볍게 뛰어가는 뒷모습이 너무도 귀여워 사뭇 바라보았다.
내게 자신들을 조현우, 이상준이라 소개했던 두 아이는
다른 동물들도 묻어줄 것이라고, 앞으로 영원히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맹세했다.
당연히 지금 그들의 고양된 마음만큼 실천하지 못할 맹세일 테다.
그러나 그들로 인해 현재는 영원으로 이어진다.
다른 생명에 대해 존중하고, 예를 다하는 모습에서 인간 본성에 대한 맹자의 말을 떠올렸다.
맹자가 인간이 본래부터 선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성선설을 주장했음은 유명하다.
그는 인간이 인의예지라는 군자의 덕을 싹 틔우는 4가지 단서로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을 가졌다(맹자, 김원중 역 2021, 122-123)는 사단설을 설파했다.
심리학도 없고, 뇌과학도 없고, 그 어떤 과학의 도움도 없었던 2400년 전,
맹자는 오로지 인간을 면밀히 관찰하고 추론하며 인간을 이해한 인문학의 대가였다.
그 당시 맹자는 인간의 어떤 모습을 보았을까?
혹시 아이들의 이런 모습을 본 건 아닐까?
사람이 아름다운 것은 그 안에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 안에 있는 사랑은 그 자신만이 흘려보낼 수 있고, 그를 통해 전해진다.
사랑이 흘러나올 수 있게, 그가 사랑을 전할 수 있게 안전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
그리고 그가 흘러넘치는 사랑에 익숙하게 하는 것.
그것이 교사의 역할이다.
모든 어른들의 역할이다.
아이들에게 받은 깜짝 선물 덕분에 나는 월요일이 기다려졌다.
모처럼 월요병 없이 출근할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