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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희대 Aug 06. 2023

사천에서 놀다

중국 사천 말고

휴가를 맞이해 사천여행을 했습니다. 사천이라고 들어는 보셨겠지만, 실제 가 보신 분이 많을 것 같지는 않네요. 저도 태어나서 처음 간 곳이었으니까요. 바다와 가깝지만 특별한 관광지는 없는 그런 곳입니다. 삼천포라는 곳이 아마 더 유명하지 않을까 싶네요. 사천은 1995년에 태어난 시라고 합니다. 삼천포시와 사천군이 합쳐져 사천시가 되었다고 하네요. 하이어라키라고 하죠. 시와 군이 합쳐졌는데, 통합명칭은 군의 이름을 땄다는 게 좀 이상합니다. 그 과정에는 뭔가 복잡한 지리적, 지역감정적 사연 같은 게 웅크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책의 출판을 전후로 25년 만에 연락이 닿은 후배가 바로 이 사천에 살고 있습니다. 바로 몇 해 전에는 미국의 LA에 살던 후밴데, 여러 사정 상 사천에 내려왔습니다. LA와 사천은 제게 달과 지구처럼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처럼 느껴졌는데, 후배는 역시 씩씩하게 잘 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곳에서 <공간 쌀>의 입주작가로 활동하며 10월에 있을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전시회의 제목은 <깨진 그릇에 담은 것>이라고 합니다. 작업의 내용을 들어보니 본인과 그릇을 동일시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동안 개인사로 인해 마음고생이 많았고, 아버지의 임종을 계기로 손을 놓고 있었던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부서진 조각들을 다시 연결 짓고 합치다 보면 이전과 형태는 비슷하지만, 상당히 다른 질감을 가진 새로운 그릇이 완성되곤 합니다. 우리가 박물관에서 보게 되는 깨진 조각들을 붙여놓은 그릇들에게 느낄 수 있는 그런 느낌입니다. 파괴적인 시간의 개입 같은 거라고 할까요. 깨지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을 새로운 형태의 그릇들입니다. 상처처럼 그릇을 가르는 선들과 그 사이의 빈 공간이 완전한 그릇은 담지 못할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습니다. 상처를 딛고 다시 일어선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아프지만 희망이 서린, 콧등이 시큰해질 것만 같은 이야기를 말이죠.

제 책에도 등장하는 제주에 사는 후배도 이번 여행에 같이 왔습니다. 녀석은 사천에 사는 후배의 후배죠. 이렇게 쓰고 보니 저와의 관계가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 같은 이야기처럼 들리네요. ㅎㅎ 아무튼 우리 셋은 1박 2일 동안 세끼를 먹으며 대학시절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25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곤 했습니다. 퍼즐처럼 기억을 맞춰보지만, 서로 조금씩은 다른 그림을 완성할 게 뻔한 그런 이야기를 말입니다. 그 오랜 시간의 후퇴를 되새김질하며 과연 나라는 인간은 무엇이었나, 를 되새겨 보기도 했습니다. 후배가 도무지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지 못할 정도로 무슨 작업을 했는지 알지 못하는, 미술 대학에 다니면서도, 작업보다는 다른 꿈을 꾸고 있었던, 지금도 완전히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있는 건 아닌가 하는. 과거의 회환과 현실의 불안이 혼재하는 그런 모습을 의식하면서 말이죠.

그곳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연애담입니다. 누군가에겐 훈장처럼, 누군가에겐 상처처럼, 또 누군가에겐 안주거리처럼 남아 있는 25년 전의 연애담은 무엇보다 흥미진진하더군요. 갓 20살을 넘긴 아이들은 연애에 굶주린 짐승 같은 존재들이었나 봅니다. 세월이 흘러 기억 속엔 스냅사진 같은 이미지 하나만 남아있지만, 그 이미지 하나로도 천일야화가 생산될 듯한 시간이었습니다.

후배의 작업실은 카페 정미소라는 곳에 있습니다. 예전에는 이름 그대로 쌀을 빻는 정미소였다고 합니다. 그 당시 사용했던 기계와 기구들이 곳곳에 보이는 정감 있는 곳입니다. 그 옆에 후배의 스튜디오가 있습니다. 과연 이 고즈넉한 사천이라는 곳에 살고 있는 후배가, 10월 개인전에서 깨진 그릇에 무엇을 담아 보여줄지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 혹 사천에 가실 일이 있으신 분은 카페 정미소에 들러주세요. 10월이 되면 쌀 대신 후배가 만든 작품의 향기로 마음이 든든해지는 곳이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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