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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희대 Oct 14. 2023

큰 상처에도 붙일 수 있는 애정의 밴드

선혜의 전시

최선혜라는 작가의 작품 이야기를 해보자. 그전에 최선혜는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한다. 작가와 작품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최선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한 학년 아래 후배긴 해도 대학에 다닐 때 그리 많은 교류가 있지는 않았다. 후배 학년에 예쁘장한 아이가 있구나, 좀 귀염성이 있네, 라고 그의 인상을 평가한 것 외에 그다지 큰 관심은 없었다. 후배들이 들어오고 내가 얼마 있다 휴학을 하고 군대를 간지라, 그들을 잘 몰랐다. 더구나 후배들 중 장수생이 많아 선배로 ‘가오’ 잡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남자 후배들의 외모는 어디 산속에서 오랫동안 자연식을 하며 미술대학이 아니라 격투기 대회를 준비한 듯해서, 지금 와서 고백하자면 말을 걸 때는 오랫동안 끌어모은 용기 같은 게 필요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최선혜라는 후배와 가깝게 지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페이스북의 메신저를 통해 문자 하나를 받았다. 수십 년 만이었다. “희대 오빠!” 라고 아주 당돌하게 말을 거는 문자였다. 처음에 웬 보이스피싱인가 하고 의심했지만, 오랜 기억을 더듬어 최선혜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25년 만인가, 30년 만인가. 가물가물했다. 헤어진 시기가 분명한 연인관계라면 정확히 년 수 정도는 계산할 수 있지만, 선혜와 언제 마지막으로 봤는지 알 길은 없었다. 관계가 깊지 않은 선후배가 그러하듯, 어느 순간 존재가 눈앞에서 사라지고, 사라졌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인생은 흘러가는 거니까.

하지만 반가웠다. 시간의 공백 따위는 없는 것처럼, 마치 몇 달 보지 못했던 사람처럼 그렇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선혜는 교수로 일하던 학교를 떠나 미국의 LA로 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사천에서 산다고 했다. 오래전에 페북 친구가 되었는데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았고, 내 활발한 활동에도 좋아요, 한번 누르지 않던 그녀였지만, 내가 페북에 쓰던 글을 꾸준히 읽은 것 같다. 갑자기 자기가 전시를 하는데, 작업에 관한 글을 써달라고 요청한 것을 보면. 내가 글이라는 것을 오랫동안 갈고닦아 ‘번쩍번쩍’하게 쓰는 줄 잘 알았던 것이다.

호기롭게 써주기로 했다. 마음속에서는 과연 원고료를 얼마나 줄 것인가, 계산했더라도 원고료 같은 걸 생각했다면 오빠, 라는 친밀함을 가득 담아 말을 걸지도 않았겠지, 라고 생각하며, 그저 재능기부를 할 생각이었다. 그랬더니 선혜가 스타벅스 커피 쿠폰 같은 것을 보내는 게 아닌가. 아, 이게 바로 그 갑오경장 때나 출현했다는 현물 원고료라는 건가…. 이걸 날름 받으면 바로 발에 족쇄가 덜컥하고 채워지는 게 분명할 터. 그리 굵은 족쇄는 아니라서, 마음만 먹으면 바로 끊어낼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LA에 있다가 사천에서 산다는 선혜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과연 그녀가 밟아왔을 50년 생은 어떤 것일까. 이것저것 따질 필요 없이, 학창 시절에 스치듯 만난 후배의 인생 궤적이 궁금했다. 갑작스러운 선혜의 등장은 한편의 흥미로운 소설의 표지처럼 보였다.

선혜의 작품에 관한 글을 쓰려면 선혜를 만나야 했다. 휴가철에 사천에 내려가기로 했다. 물론 가족과 같이 가면 좋지만, 딸과 아들의 학원비가 아까운 와이프는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다고 했다. 뭐 별수 없지, 하고 아무 생각 없이 혼자 사천에 내려간다고 하자 선혜가 난색을 표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거 같았는데, 어찌나 동작이 컸던지, 전화기 너머에서도 그 소리가 휠랄레, 휠랄레 들리는 듯했다. 아직 미모가 죽지 않아, 혼자 온 외간 남자를 만나는 건 마을 커뮤니티에 어마무시한 먹잇감을 던져주는 일이라고 펄쩍 뛰는 게 아닌가. 생각해보니, 미모가 있건 없건 그건 좀 이상한 모양새였다. 그래서 선혜의 후배이자 내 후배이기도 한, 러시아 마트료슈카 인형 같은 관계인 제주도에 사는 병기도 같이 가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한날한시 사천에 우리 세 사람은 모였다. 하나는 비행기를 타고, 하나는 고속버스를 타고, 하나는 자가용을 타고 터미널로. 남과 북에서 이산가족을 만나듯 그렇게. 터미널에 내리는 순간 멀리서 준대형 SUV 한 대가 보였는데, 창문을 열고 여자 사람 하나가 삐죽이 얼굴을 내밀더니, 양손으로 망원경 형태를 만들어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아, 저 사람이 선혜구나, 바로 아는 순간이었다. 내가 아는 선혜는 하나도 어색하지 않게 손망원경을 만들 사람이니까. 그는 사소한 행동에서도 공예가의 멋스러움을 발휘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있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레스토랑에서 맛난 점심을 먹었다. 뷰가 요리에 양념 이상으로 얹혀진 곳이라, 실제 맛 이상으로 맛있게 느껴졌다. 그리고 우리는 그녀의 작업실로 갔다. 선혜가 입주작가로 있는 곳 옆에는 정미소라는 카페도 있었다. 예전에 실제 정미소였다는데, 아직도 쌀 냄새가 코를 찌르는 곳이라고 하면 거짓말이고, 여기저기 당시 사용했던 기계 등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평일 낮이라 손님이 그리 많지 않았는데, 제법 큰길 옆이라 위치도 나쁘지 않았다. 높은 천고가 이곳이 단순한 카페가 아님을 말해주고, 여기저기 인테리어 소품들이 눈길을 끌었다. 전체적인 인상은 뭔가를 공들여 기획해 가꿨다기보다는 세월과 함께 드나드는 사람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놓인 물건들 같았다. 부담 없이 친근한 느낌이랄까. 그 옆에 선혜의 작업실이 있었다. 작업실은 아담했다. 그곳에는 선혜가 작업하던 작품들 중 완성을 목전에 둔 것과, 목후에 둔 것, 목에 걸어둔 것 등등 다양했다.


선혜의 작품 시리즈 제목은 <깨진 그릇에 담은 것> 이라고 한다. 깨진 그릇에 무엇이 담길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액체만 아니면 그럭저럭 담길 것이 많아 보였다. 선혜가 담은 것이 쉰 우유는 아닌 것이 분명했다. 무엇이 담겼는지 몰라도 작가의 말을 들어보면 한 가지 분명한 건, 선혜는 깨진 그릇과 자신을 동일시했다. 자신도 연약한 그릇처럼 깨졌다는 것. 그리고 그 조각을 하나하나 모아 다시 그릇의 형태를 만들 듯, 자신을 추슬렀다는 것이다. 다시 합체된 그릇이 이전의 그릇과 다른 향을 품듯이, 작가로서의 새로운 출발을 알린 선혜의 마음도 그런 것 같았다. 그것은 고난을 뚫고 삶의 지혜를 터득한 사람의 굳건함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시 깨질 일 없는. 아니 다시 부서져도 자석처럼 스멀스멀 붙을 것 같은 인력을 가진 것처럼. 그것은 상처뿐인 영광이 아니라, 영광의 굵직한 스크래치일 것이다.


그즈음 나도 책 한 권을 냈다. 제목은 <15라운드를 버틴 록키처럼>. 글쓰기를 위해 무명의 권투선수처럼 고군분투해 온 내 인생의 기록이다. 짧은 에세이 50여 편은 군데군데, 내가 만나고 감동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녹아있다. 그들 대부분은 선혜의 작품 제목처럼 깨진 그릇이나 다름없다. 지금도 여전히 깨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다시 연락이 닿은 것은 어쩌면 이 상처들의 부름을 받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선혜의 미국 생활은 녹록지 않았던 것 같다. 유추해 보건데, 작업을 그만두고, 작가로서의 미래를 포기하고 가족을 위해 희생 아닌 희생을 하던 때였으리라. 그리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도 그 옛날 작업에 열중하던 자신을 어디에서도 만나지 못했다. 아버지의 병수발을 하고, 우울증까지 겹치면서 힘겹게 생활하던 어느 순간 자신의 마음속에 웅크리고 있던 불씨를 살렸다고 한다. 일명 대학생 때 불렸다던 ‘작업에 미친년’이라는 그 불씨는 다행히 꺼지지 않아, 집 근처에서 작업을 위한 재료를 만나는 순간 다시 거칠게 발화했다고. 하지만 어디서 어떻게 시작할지 몰라, 우선 깨진 자신을 들여다보고, 조각들을 모아 하나하나 붙이다 보니, 작업이 가야 할 길을 찾았다.

처음에 선혜가 LA에서 살다가 사천으로 왔다고 했을 때, 사천이란 곳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나로서는 우리 어머니가 자주 애청하는 <나는 자연인이다>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보았다(아마도 LA와 사천은 너무 멀었고, 먼 이국의 번화한 도시가 주는 뉘앙스의 기저효과 때문인지도). 그녀가 무슨 사연 때문인지 모든 인간관계를 끊고 홀로 유유자적하게 사는 모습을 떠올렸더랬다. 선혜가 실제로 그렇게 살지는 않았고, 또 사천이 그런 곳은 아니지만, 슬로시티처럼 보이는 사천의 풍경은 나름 그녀를 포근하게 품어준 듯했다. 사천 여행 중 숙소에서 바라본 조그만 항구는 그녀가 작업을 시작하기에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잔잔한 바다의 물결과 반짝임은 어떤 위로처럼 보이기도 했으니까.

많은 작가들이 평생 한 가지 화두를 가지고 작업에 몰두한다. 그 화두는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자신만의 문제일 것이다. 애초에 그런 문제가 없었다면 작가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선혜가 붙들고 있는 문제는 상처 입은 자아를 어떤 식으로든 일으켜 세워 세상을 좀 더 멋지게 살라고 다독이는 방법 같다. 겉모습은 군데군데 꿰맨 상처가 줄지어 있어도. 이렇게 이야기하면 너무 진부한 결론이지만, 결국 그릇 안에 담아야 하는 건, 자신과 세상에 대한 애정일 것이다. 서로의 상처를 너무 깊숙이 들여다보지 않되, 아프지 않도록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애정말이다. 그 애정을 크기로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다. 작더라도 상처에 잘 붙일 수 있다면.


사천에서 본 양광(陽光) 덕에 세상이 조금 더 사랑스러워졌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깨진 그릇에 담은 것> 전시는 10/4~10/23 경남 사천 카페 정미소에서 열립니다. 근처에 지나시는 분들이 계시면 한번 들러보시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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