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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고운 Feb 22. 2019

네가 만들어준 페이지 중 첫번째

6월, 지난 ‘유-궐’에 전하지 못한 말

6월의 올바른 발음은 유월[yuwol]이다.


나는 그를 만나기 전까지 유월을 '유궐'이라 발음했다.


그러니까 유 밑에 있던 받침 ㄱ을 띄어다가 바로 뒤따라오는 월의 머리에 끼워 넣어 “유궐!!”이라고 발음했는데, 그는 나의 유궐이라는 발음을 들을 때마다 미간을 찌푸리며, 때로는 얼굴에서 표정을 지워버리고는 아니지 유월이지. 유월. 따라 해봐. 유—월. 내 여자친구가 이런 걸 틀리지 않았으면 좋겠어라고 뒷말을 천천히 흐렸다.


그래, 적어도 시월을 “시붤!!!”로 발음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 자꾸 시월을 시붤이라고 말하는 멍청한 여자처럼 비쳤을 것 같단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도 안돼와 안되를 헷갈려 하는 친구에게 구분법을 알려줬던 적이 있다. 돼 자리에 해와 하를 넣어 말이 되는 문장인지 생각해보라면서.




유월,


유-월,


u-월,


you-월.


너와 함께 맞이한 달,


새로운 달,


뉴 월.




그가 했던 말과 you를 번갈아 떠올리며 정확하고 또박하게 "you-월"이라며 그의 이름 다음으로 그 달에는 유월을 가장 많이 읊조렸다.



유월


같은 단어를 오랜 시간 관찰하면 낯설게 느껴진다. 성경 책에서 히브리어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상형문자 같아 보이기도 하고 유월은 발음할수록 내게서 멀어져 갔다.


유월이 드디어 무의식중에도 입술에 착 달라붙을 수 있게 된 순간의 나는 술자리 예절을 몰라 비즈니스에서 실수하기 좋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고운아, 술잔을 부딪힐 때는 나보다 지위가 높거나 나이가 많은 사람보다 조금 더 아래로 부딪혀야 하는 거야. 이건 기본예절이야. 몰랐네. 이제부터 알아가지 뭐라며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그는 자주 얼굴에서 표정을 지웠고 끊임없이 내게서 부족한 점을 찾아냈다.


6월에는 지적이 하나였지만 7월에는 오전 일찍 전화해서 잠을 깨우지 말 것을, 전화를 두 번 이상 받지 않을 때는 못 받는 이유가 있는 것이니 상대방을 생각해서 더 이상 전화하지 말 것을, 계단을 내려갈 때는 사뿐히 내려가서 층간 소음을 만들지 말 것에 대해 말했다. 나는 그 해 7월, 내가 아는 한 가장 이기적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배려가 무엇인 줄 전혀 모르고 예의 없는 사람.


고운아, 너는 숟가락질을 할 때 숟가락을 끝까지 안 쳐다보더라. 입에 넣을 때 숟가락을 쳐다보면서 먹어봐. 그럼 식탁에 음식을 흘릴 일이 없잖아. 그리고 밥 남기거나 깨끗이 안 비우는 거 식사 예절 아니야. 우리 어머니는 그런 거 싫어해. 싹싹 먹어야지.


내가 다 잘 되라고 하는 소리겠지. 나는 그가 나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는 고마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다음에는 사랑한다는 말을 시도 때도 없이 남발하는 것에 대해, 내 걸음걸이에 대해, 글을 쓸 때 마침표를 내 맘대로 찍는 것에 대해, 눈썹을 제대로 다듬을 줄 모르는 것에 대해, 설거지 예절에 대해, 운전면허가 아직까지 없는 것에 대해, 업무 관련 전화를 받을 때 목소리를 까는 것에 대해, 살이 찐 것에 대해.


그다음엔 거칠고 주름이 많은 내 손가락이 보기 흉하다며 SNS에 손 사진을 올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살쪄서 종아리가 굵어진 게 보기 안 좋다고 원피스는 입을 생각을 말라고, 그렇지만 다른 여자친구들 처럼 옷도 좀 갖춰 입고 꾸미고 다녔으면 좋겠다고, 쓸데없이 공책을 사 모으는 것에 대해.


그냥 차라리 고운아, 이쯤에서 한번 다시 태어나 보는 게 어때라고 말해주었다면 그래 고맙다 시발놈아. 그럼 이번 생에서는 꺼져줄래라고 말해줄 수 있었을 텐데 어리석었던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그의 말을 사랑해서라고 해석하며 저것들을 기어코 다 고쳐놓았다.


통아저씨. 호리호리한 통아저씨가 작은 상자에 몸을 구겨 넣는 장면이 내 모습과 겹쳐 보였다. 나는 단점을 고칠 때마다 그가 만든 비좁은 틀 안에 그가 규정해 놓은 어떤 여성성에 맞는 사람이 되기 위해 그 안에 들어가려고 팔을 꺾고, 다리를 접어넣는 상상을 하곤 했다.


행복하긴커녕 당장 숨이 터져버릴 것 같은데 그때의 나는 비굴했던 것 같다. 있는 그대로 나를 사랑해줘라고 말할 용기가 없었다.


사랑받기 위해 구걸하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할 때 즈음 그는 미안해.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어.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고운아, 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라며 나의 단점 찾기를 그만두었다.


아니다. 그는 마지막까지도 한마디를 더 붙였다. 그년은 아니 그녀는 내가 음식 흘리면 안 된다 그러면 뭐라 그러는지 알아. 어, 지금 음식 흘린다고 지적하는 사람 누구 지라며 귀엽게 맞받아치는데 나의 잘못된 행동을 깨닫게 해주는 현명한 사람이야. 난 그녀같은 사람이 좋아. 고운아, 너는 지금까지 사실 잘못한 게 하나도 없었어. 내가 속물이라 그래. 차라리 날 안 좋아하던 제멋대로인 그때 네 모습이 좋았어. 이제는 더이상 네가 싫지 않아.




그를 잃지 않으려다가


나는 유궐과 함께


나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어렸을 때 윌리를 죽도록 찾지 못했다. 눈이 빠지게 책 속에서 윌리를 찾아 헤매다가 그때부터 빨간색이 싫어진 것 같은데 윌리를 찾는다면 그의 옆자리에 내가 서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너도 진짜 사랑을 한 번 해봐.
그 사람 말투가 조금만 틀려져도 얼마나 가슴 아픈지
 영화 <연애의목적> 중에서





나는 나인걸.

짧지만 한때는 내가 그에게 전부가 아닐까 느낄 만큼 넘치도록 사랑받았던 계절도 분명 있었다. 카메라 배터리가 없다는 걸 촬영 시작 전에야 알고 당황했던 어느 날, 그는 내게 팔을 쭉 뻗곤 주먹을 펼쳐 보이며 혹시 이거 찾냐며 검정 배터리를 전달해주었다. 충전한 기억이 없는데 완충된 상태로. 그러곤 돌아서며 싱긋 웃는데 나는 그때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게 된 것 같다.


나를 만나며 점점 나의 모든 면이 단점으로만 느껴졌을 때 그 역시 괴롭고 불행하지 않았을까. 그가 앞으로 만날 인연들은 나처럼 고쳐 쓰려는 마음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단점까지도 사랑으로 감쌀 수 있는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상대방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그래서 상대방의 슬픔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어떤 감정인지 느껴볼 수 있었으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유월을 두 번 다시 유궐이라 발음하지 않게 만들어준 그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또 고맙다.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지 않아서. 내가 상대방을 위해 배려하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도록 노력하고 발버둥치게 만들어줘서. 덕분에 대화 중 다른 사람이 유월을 유궐이라 발음해도 나는 지적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게다가 타인이 내게하는 웬만한 비난과 질책에도 이제 좀처럼 멘탈이 흔들리지 않는다. 개소리에 일일이 반응하는 것은 감정 낭비라는 걸 깨달아서.


나는 다시 쓸데없이 공책을 사 모은다. 걷고 싶은 대로 걷는다. 와인잔에 커피를 부어 마시며 여전히 후드티에 청바지를 그리고 스니커즈를 신고 다닌다. 화장하고 싶지 않은 날은 하지 않는다. 내 술잔에 상대방이 물 잔을 부딪히든 생수통을 부딪히든 즐거우면 그만이다.


햇빛이 닿는 곳마다 촘촘히 박힌 내 볼의 주근깨가 마음에 든다. 자전거를 타느라 시커멓게 그을린 팔이 좋다. 잔주름 많고 곱지 못한 내 손은 그동안 궂은일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온 내 훈장같이 느껴진다.


다시 만난 그는 언어파괴의 주범이 되어 있었다. 혀가 반쯤 없어진 것 같은데 무슨 말인지도 모를 줄임말과 고의로 비문을 만들어 어떤 여자와 대화를 하고 있었고 그 여자는 실수로 커피를 테이블에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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