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가명못정함 Jun 16. 2024

'내로남불' 고백

나만 아는 내 창피함은 덤

17년 전 고2 시절, 수능 예비소집일을 맞아 오전 수업만 한 날이 있었다. 모처럼 일찍 끝난 날, 친구 2명과 '비장한' 계획을 세웠다. "우리도 곧 고3이다! 무려 바람을 쐬러 가 새 각오를 다지고 오자"는 약속이었다.


당시 우리로선 바람을 쐰다는 게 꽤 큰 사건이었다. 두발규제 6mm 반삭발, 평일 야간 자율학습 의무에다 일요일 등교도 필수. '스파르타'로 유명한 학교였는데, 입학 때 속칭 '신체포기 각서'로 불리는 서약서까지 써야 했더랬다. "학교의 여하한 조치(체벌)에도 순응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지역에서 웬만한 사람은 다 알던 학교였던 터라, 이런 데서 여유가 생겨 바람을 쐰다는 건 몹시 대단한 역사였다.  


이토록 기념비적인 날, 어디로 가야 바람을 잘 쑀다고 소문이 날까. 고심을 거듭하다 결정한 곳은… 지금 생각하면 소박하고 순수하기 짝도 없는, 다름 아닌 '63빌딩'이었다. 정확히는 서울의 유명 동네인 인사동을 대강 돌아다니고, 광화문 일대를 산책한 후, 한강을 구경한 다음, 해가 떨어지는 대로 63빌딩 전망대에 올라 야경을 누린다는 포부였다.


정말 이 계획대로 쭉-돌았다. 당연히 늦은 밤 63빌딩도 갔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서울의 풍경은 '실재' 같지 않았다. '꿈과 환상'의 도시로 비쳤다. 늘 교실에 처박혀 지냈던 나와 친구들은 이날 마음 한편에 일제히 '서울드림'을 품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인서울'을 했어야 했다. 그치만 인서울은 고사하고 대학 자체를 가지 않았다. 하필 고3 때 사춘기가 와서 반항과 일탈을 일삼았다.


그러다 군에 입대했다. 공교롭게도 군생활을 서울에서 하게 됐다. 참나, 어이가 없어서. '서울드림'이 이따위 식으로 현실화할 줄 몰랐고 원치도 않았는데, 모쪼록 그렇게 되고 말았다. 서울 중에서도 광화문과 여의도에 주로 있었다.


나름 빡쎘던 군생활, 그러나 이를 버틸 수 있던 데에는 광화문과 여의도의 풍경이 큰 몫을 했다.


이런 데서 지내고 싶다. 이 동네에서 일하고 싶어. 여길 거니는 직장인들과 한 무리가 되고 싶어. 얼마나 멋질까. 점심시간엔 청계천을 산책할 거야. 저녁엔 이 빌딩들 사이사이 있는 술집에서 회식을 하겠어. 퇴근 땐 이 높은 건물들이 쏟아내는 화려한 불빛에 샤워라도 하는 마냥, 만끽 또 만끽하며 귀가해야지. 아! 어른이 되면 바로 이곳 광화문이, 여의도가 아주 질려버렸으면 좋겠어. 그 정도로 이곳에 녹아들고 싶어.     


군에 복무하며 철이 들었는지, 전역 후에야 대학에 들어갔고 제때 취업도 했다.


그리고…광화문에서, 여의도에서 일을 하게 됐다. 꿈과 환상 같았다. 가끔 일이 너무 고되고, 울화통이 치밀 만큼 열받은 순간도 있었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마음이 조금은 풀렸다.


"그래, 이 꿈과 환상의 동네에 내 책상이 하나 있다."



꿈과 환상에서 지내다 가끔은 지방으로 출장을 떠난다. 꽤 많이 다녔다. 제주도와 백령도 등을 비롯해 전국 8도를 다 다녀본 듯하다. 일 특성상 지방 가운데서도 시골 지역으로 자주 향했는데, 갈 때면 '힐링'하는 마음이 지배적이었다. 물론 서울로 올라올 때는 출장 성과에 따라 속내가 불편한 때도 있었지만, 아무튼 이런 순간만 제외하면 대체로 내면이 평온했다.


그런데 이런 힐링도 자주 하면 지겨워지기 마련이다. 직장 8년 차가 되어 구석구석을 다니다 보니, 이젠 힐링이나마나 여기가 저기 같고, 저기가 여기 같고, 그저 건조해졌다. 사실 이는 서울도 마찬가지. 예전처럼 서울 풍경에 감명받는 시기는 진즉에 지나갔다.


하지만 다행인 점 한 가지. 새로운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귀에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시골 지역에 가면 현지 주민들과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곤 한다. 과거에는 출장 목적에 꼭 부합하는 얘기 외에는 가슴에 담아두는 게 없었으나, 이젠 어느 정도 새기고 간직하는 그곳의 말들과 풍경과 분위기가 생겼달까.



         여기가 한때는 참 좋았어       


지역에서 만난 어르신들은 으레 이 같이 말씀하시곤 했다. 내가 출장지에서 본 시골의 풍경은 건물만 남긴 채 폐교한 초등학교, 단연 텅텅 빈 운동장, 동네 어딜 가도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없고, 심지어 주민도 몇 안 되는 까닭에 사람 목소리 자체가 몹시 희미하게 들리는 그런 곳이었다.


한때는,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이렇지 않았단다. 아이들이 어찌나 말썽을 피우는지 골목 곳곳에 낙서를 하는 통에 어른들이 지우느라 애를 먹었고, 시장은 말 그대로 시장통이라 산만하기 짝이 없었고, 동네 주민들끼리는 하하호호, 어떤 땐 술 먹고 서로 싸우기도 했지만…이제는 그마저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고.


심지어 어떤 곳은 폐교한 초등학교가 노인요양원으로 바뀌었다. 이 마을 누군가는 당신이 어릴 적 뛰어놀던 초등학교에서 노년으로서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해야 할지도 모른다.   


젊은 청년들이 전부 서울로 떠나 버리고, 고로 여기 남은 어른들은 더욱 외로워지고, 이토록 썰렁해져 가는 동네를 보면서도, 나머지 주민들은 "우리 마을 아무개가 서울로 갔다"고 자랑하게 되는 현실.


또 다른 몇몇 지역은 20대 청년들이 읍내 카페 등에서 아르바이트에 열심이었다. 헌데 이를 지켜보는 어른들은 '고맙다' 해야 할지, '미안하다' 해야 할지를 알지 못한다.


이런 아이러니를 피부로 체감하면 괜스레 숙연해진달까.  잘못도 아닌데, 왠지 내 마음에 무거운 벽돌 수십 장이 쿵 떨어지는 것만 같다.

 


이렇게 출장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와 주변의 전경을 바라보면 마음이 영 예전 같지가 않다.


얼마 전 확장공사가 마무리된 광화문광장을 걸었을 땐 유독 뒤틀린 생각이 들었다. "시골은 소멸을 걱정하는데, 서울만 이렇게 개발하냐"는 게 온당치 않은 비판이란 걸 알지만, 심정적으론 "과하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웠다. 화려한 조명이 수를 놓은 서울로 다리를 보면서도 괜히 "오바다" 식의 시비를 걸게 되고, 여의도 고층빌딩들을 볼 때 역시 "너무 한다"는 트집을 잡게 됐다.


뭐랄까 "세상이 너무 가혹하다" 혹은 "무섭다"는 느낌이었달까. 서울처럼, 지방에도 시골에도 사람들이 똑같이 살아가고 있는데 이 말도 안 되는 현실의 격차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조금 혼란스러웠다.


문득 출장 갈 때 내가 느꼈던 그 '힐링감'. 이 말속에 어쩌면 지역을 깔보는 심리가 깔려 있진 않았는지도 돌아봤다. 누군가의 삶의 터전을 놓고, 내가 하루 이틀 치 '힐링'이라 여기는 심보가 과연 옳냐는 물음이었다.  



서울이든 수도권이든, 그 외 지역이든 시골이든 다 사람 사는 곳이다. 비교 우위가 존재 않고 모두에 소중한 터전이다.


얼마 전 한 어촌으로 출장을 다녀왔다. 에메랄드빛을 띄는 바다가 장관인 어느 마을에 들어섰다.


여기서 만난 한 주민에게 명함을 건넸다. 그는 '서울'로 찍힌 주소지를 확인하고는, "서울서 뭣하러 여기까지 왔어?" 물었다. 용건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너무 정 없지 않나. 난 나름 '라포' 형성 일환으로 소소한 얘기부터 건넸다.


나 : 선생님, 여기 동네가 엄청 아름답네요. 영화 속 한 장면 같아요.  


주민 : 그럼 너도 여기 와서 살래?

    

나 : ......................       


아, 이런 내로남불을 어찌할까.


그러고보면 내가 출장을 다니는 것도 실은 열심히 일하겠다는 의지…즉 서울에 마련된 내 책상 하나, 이거 절대 빼지 않겠노라 애쓰는 게 아니던가.



누구에게나 '나만 아는 나만의 창피함' 같은 게 있다. 나야 그릇이 작아 내로남불이지만…


세상 어느 구석이 고장났단 생각 진심이거늘어느 한날, 지방 출장을 앞두고 서울에서 퇴근하며 떠올린 생각들이다.


얼마 전 유명 유튜브 채널이 지방 비하 논란으로 시끄러웠다. 나 역시 그들을 비판했지만, 실은 나라고 다를 게 있는지 새삼 돌아본다. 그렇다고 남들은, 아니 우리 대부분이 과연 얼마나 다를지도 물음표다. 만약 모두가 비슷하다면, 세상이 이렇게 만든 건 아닌지, 그렇다면 세상이 잘못 돼도 한참 잘못된 게 아닐는지. 영 부대낀다.



<글 속의 글>


그러고보니 17년 전 63빌딩에 갔던 그날. 함께였던 친구들과 오랜 시간이 흘러 모두가 직장인이 되어 다시 뭉친 날이 있었다. 술을 마시며 서로 '63빌딩에 갔던 날 기억하냐'고, '무척 재밌는 추억이었다'고, 신나는 수다를 이어나갔다.  


그날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들도 공유했다.


한 친구는 "63빌딩 전망대에서 바이올린 연주자들이 공연했던 게 가장 생생히 떠오른다"고 했다. 신기했다. 나와 다른 친구는 바이올린은 전혀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한 친구는 "오히려 인사동이 가장 좋았다"고 했다. 이 또한 신기했다. 인사동에서 우리가 뭘 했는지, 구체적으로 기억한 애는 얘뿐이었다.


나는 "63빌딩에서 내려와 지하철역(대방역)까지 걸었던 기억이 가장 선명하다"고 했다. 대방역으로 향하며 국회의사당 앞을 지났는데, 늦은 밤 환한 불이 켜진 국회가 어쩜 그리 멋있어 보였는지. 마치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모인 공간' 같다는 환상에 젖어 '나도 저기 있고 싶다'는 갈망이 들었었다. 지금은 '왜 그랬을까' 싶은 흑역사다.


이 말을 들은 친구들 모두 신기해했다. 얘네는 국회가 기억에 안 난댔다.


혹시 내가 '본투비 속물'이었나. 또 나만 아는 내 창피함을 만들고 말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꼰대 전도사' 활약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