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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녁 Feb 12. 2017

청춘 18

둘째 날

2015.12.31. 목


07:45

밤사이 실버 페리는 거친 밤바다를 헤치고 토마코마이 항에 도착했다. 항구 안 로비에서 토마코마이 역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며 잠을 쫓았다. 버스를 타기 위해 항구 밖으로 나가자 홋카이도의 차가운 새벽 공기가 몸속 깊이 들어왔다. 버스로 30분 정도를 달려 타마코마이 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역내 대합실에서 다시 삿포로행 열차를 기다렸다. 이른 아침 시간의 역내는 한산했다. 어제 분명 나는 이 시간에 도쿄 역에 있었는데, 지금은 홋카이도의 토마코마이 역에 서있다. 이곳의 차가운 아침 공기를 마시기까지 총 12번의 환승을 했고, 10대의 JR열차, 2대의 버스를 이용했다. 그리고 실버 페리에서의 하룻밤. 하늘을 통해서 왔더라면 두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을 거리. 그 거리를 나는 하루를 꼬박 걸려서야 올 수 있었다. 가을의 끝 자락에서 겨울의 세계로 입경하던 시간. 그 유명한 설국의 첫 문장처럼 나는 기나긴 시간의 터널을 지나 눈의 고장에 도착해 있었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던 토호쿠 지방의 풍경이 아직도 눈에서 가시지 않는다.


얼마 있지 않아 삿포로로 향하는 열차에 올랐다. 커다란 차창 밖으로 파란 하늘과 회색 빛 구름이 펼쳐지고 따스함을 머금은 햇빛이 들어왔다. 내가 탄 열차 안에는 어느 남성과 나 단 둘 뿐이었다. 역에 정차할 때도 그 누구 하나 열차에 오르지 않았다. 함께 타고 있던 남성도 내리고 이윽고 열차 안에 나 혼자가 되었다. 텅 빈 열차 안에 나 홀로 있는 경험은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나 도쿄에서는. 평소 같았으면 사람들로 가득 찬 출근 열차를 타고 일터로 나가야 할 시간. 나는 그 시간에 아무도 없는 열차를 타고서 삿포로로 향하고 있다. 차창 밖엔 앙상한 나무들 사이로 주택가가 펼쳐졌다. 모두 다 2층 건물로 지붕은 하나 같이 삼각형이었다. 역에 정차할 때마다 처음 보는 역 이름이 푯말에 세겨져 있었다. 생소한 지명을 눈으로 짚어보는 사이 내가 홋카이도에 와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주택가를 벗어나 공장 단지에 들어섰고 앙상한 나뭇가지가 빽빽이 들어서 있는 산길을 지났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드넓은 벌판이 펼쳐졌다.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인 벌판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 열차의 끝에는 나만을 위한 세상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버렸으면 하고 생각했다.


사진 찍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이 순간을 어떻게 해서든 사진이 아닌 내 머릿속에 남겨 두고 싶었다. 하지만 이 순간이 눈처럼 녹아버리지는 않을까 겁이 나 자꾸만 셔터를 눌러대는 나를 막을 길이 없었다.


























11:50

삿포로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오오도리 공원이었다. 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장갑과 핫팩을 구입했다. 하루 사이 영하로 떨어진 날씨 속을 걸어 다니려면 아무래도 단단히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저 멀리 보이는 TV타워를 이정표 삼아 눈 길을 걸어나갔다. 공원에는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눈으로 덮인 하얀 공터가 끝없이 이어져 있을 뿐이었다. 이 곳에서 사람들로 가득한 눈 축제가 열린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덩그러니 놓인 눈사람이 웃으며 나를 반겨주지 않았다면 나는 꽤 실망을 했을지도 모른다. 두 번째로 향한 곳은 삿포로 맥주 박물관이었다. 가는 길에 빨간 벽돌의 삿포로 맥주 공장이 있어서 들어가 보았지만 공장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리고 얼마간 더 걸어가 도착한 맥주 박물관 역시 영업을 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연말연시 기간이라 영업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삿포로까지 오는 열차에 사람이 없던 것도 오오도리 공원에 사람이 없던 것도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오늘은 올해의 마지막 날인 것이다. 모두 다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고향으로 돌아가 있을 시간. 가게문을 닫고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있을 시간이었다. 그런 때 나는 홀로 이곳에 찾아온 것이다. 세 번째로 내가 향한 곳은 삿포로 라멘 골목이었다. 삿포로 시내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허기진 배를 더욱 허기지게 만들었다. 어디를 가나 온통 하얀색 일색이었다. 길가에는 하얀 눈이 쌓여 있었고, 도로 역시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심지어 삿포로에는 택시조차 하앴다. 도로 위를 달리는 노면전차도 하얀 게 아닐까 하는 기대를 해보았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어떤 노면전차는 에도시대를 연상시키는 스타일이었고, 또 어떤 노면전차는 알록달록 유치원 스타일이었다. 길을 걸으며 가지각색의 노면전차를 만나는 재미가 쏠쏠해 하루 종일 노면 전차만 본다 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라멘 골목에는 현지인은 그리 많지 않고 대부분 여행객들뿐이었다. 내 뒤로 단체 중국 관광객들이 오는 모습이 보였다. 점심시간인지라 그들에게 자리를 뺏기지는 않을까 서둘러 가게를 찾아 나섰다. 골목 안에는 정말 라멘을 파는 가게뿐이었다. 절반 정도는 문이 닫혀 있는 것이 아쉬웠지만 그래도 골목 안에는 여전히 라멘 냄새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날이 추워서 그런지 얼큰한 음식이 먹고 싶었다. 매울 신(辛) 자가 창문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가게로 들어갔다. 가게 안은 매우 비좁았다. 테이블 석은 없고 다 합쳐봐야 열 자리 남짓한 카운터 석이 있을 뿐이었다. 통로 또한 좁기는 마찬가지라 자리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미리 않아 있는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한껏 몸을 앞으로 내밀어준 덕에 무사히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라멘은 생각보다 맵지 않았다. 일본인의 매운맛 강도는 내가 느끼는 매운맛과는 다르다는 것을 또 한 번 느꼈다. 하지만 라멘 자체로서는 훌륭한 맛이었다. 과연 홋카이도에서 먹는 라멘이란 이래야 한다는 생각이 들만큼. 카운터 가득 들어찬 사람들이 아무런 말 없이 라멘을 먹고 있는 모습은 과히 장관이었다. 후루룩 면발이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소리만이 그 좁은 공간 안에서 쉬지 않고 들릴 뿐이었다.




































11:50

이번 여행의 첫 난관에 봉착했다. 삿포로 역에서 오타루로 가는 열차를 타려 했으나 역 내에서는 눈이 많이 내려 선로 정비가 이루어지고 있고 그로 인해 열차 운행이 중지되었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역무원에게 가서 직접 물어보니 아직 운행 재개의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다고 했다. 이미 삿포로는 볼 만큼 봤고, 사실은 삿포로보다는 오타루를 더 가보고 싶었다. 러브레터의 배경지. 그것만으로도 내가 오타루를 가야 할 구체적인 이유는 101가지를 넘을 것만 같았다. 그곳에 가보기를 얼마나 갈망했던가. 그런데 코 앞까지 온 이 마당에 이렇게 발이 묵여 있어야 한다니. 끊임없이 이어지는 지연 안내 방송에 짜증이 일어날 때 즈음 한 시간 후에 열차 운행이 재개된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가슴속을 꽉 막고 있던 무엇인가가 서서히 녹아드는 느낌이 들었다. 한 시간 정도 역 근처를 배회하고 오타루 가는 열차에 올랐다.


오타루로 향하는 하늘 위는 온통 회백색 구름이 끼어있었다. 구름은 당장이라도 부스럼이 되어 눈처럼 떨어질 것만 같았다. 구름 밑으로는 드넓은 겨울 바다가 펼쳐졌다. 거친 겨울바람에 맞서듯 바다는 쉬지 않고 파도를 만들어냈다. 그 위를 갈매기가 날개 짓 하나 없이 홀로 날고 있었다. 바다의 풍경이 끝나자 그를 대신 해 동화에나 나올법한 역과 집이 오타루로 향하는 내 가슴에 쉬지 않고 두 방망이질을 해 대었다.


























14:15

오타루 역에 도착하니 노란 안전모를 쓰고 제설 작업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은 눈이 내리고 있지 않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꽤 많은 양의 눈이 내린 모양이다. 그래서 내가 이 곳에 오는 게 늦어진 것이고. 오타루는 역에서부터 러브레터의 영화 속 분위기를 자아냈다. 유리 공예가 유명한 곳답게 그냥 달려 있어도 될 법한 전등 하나도 유리 공예품으로 모두 영화의 소품처럼 느껴졌다. 개찰구를 빠져나가자 더욱 그럴듯한 유리 공예품이 네모난 유리 관 안에 전시되어, 역을 빠져나가기도 전부터 이곳에서의 여행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크지 않은 역 안에는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다들 각자의 여행 준비로 분주했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은 안내 팜플랫을 펼쳐 들고 가야 할 장소를 확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눈 속을 향해 당당히 걸어가는 서양사람의 모습도 보였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면서 떨구어 놓은 눈이 녹아, 역 안의 바닥은 출구부터 진하게 젖어있었다.


‘홋카이도의 거점 무역항으로 발전한 오타루는 선박들의 화물 하선 작업을 위해 1914년부터 1923년까지 운하를 건설했다. 길이는 1.3km, 폭은 40m이다. 선박들이 드나들던 운하는 1986년에 운하 주위에 산책로를 정비하면서 오타루를 대표하는 관광지로 탈바꿈했다. 밤이면 이국적인 야경이 펼쳐진다. 주위에는 창고를 개조해 만든 고급 레스토랑, 유리 공예관, 골동품 매장 등이 있다.’ 두산백과에서 오타루 운하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운하의 산책로를 걷고 있다. 오타루에 오면 모두가 반드시 들르는 오타루 운하. 이곳에 와보니 사람들이 왜 이곳을 찾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살아오면서 어딘가에 흘렸을 추억. 도무지 기억하려 해도 기억나지 않는 추억. 그때는 너무 힘이 들어 마음속 깊숙이 묻어 두었던 추억. 그 추억의 빈자리에 이 풍경을 가져가 맞대 보고 싶어 진다. 이 거리를 걷고 있으면 잃어버렸던 추억을 찾아 다시금 꺼내어 놓게 된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그런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16:50

가고 싶은 곳은 많지만 추위를 견뎌낼 재간이 없다. 어디든 좋으니 추위를 피할 만한 곳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래서 간 곳이 오타루 오르골당. 식당과 잡화점이 즐비한 사카이마치를 한참이나 걸어간 끝에 메르헨 교차로에 도착했다. 교차로 맞은편에 한눈에 보기에도 예쁘장한 벽돌 건물이 눈에 띄었는데 그곳이 바로 오타루 오르골당이었다. 건물 앞에 놓인 일 층높이의 시계탑에서는 하얀 증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오르골당의 실내는 화려했다. 다소 어두운 조명 아래 오르골들이 반짝이고 있었고, 2층까지 뚫려있는 높은 천장은 이곳에서의 시간을 더욱 여유롭게 만들어주었다. 수천 개의 오르골에서 멜로디가 품어져 나왔지만 전혀 시끄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구석구석 천천히 음미하며 지금의 시간을 즐겼다. 오르골은 일본에 있는 마을 수만큼이나 종류가 다양했고 특색도 가지각색이었다. 우선 외관의 아름다움에 끌리고 그다음으로 그 소리에 반한다. 그 조그마한 오르골이 어떤 멜로디를 품고 있을지는 직접 들어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다. 겉모습은 아름답지만 차가운 성격의 여인은 있을지언정, 그러한 오르골은 적어도 이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모두 다 따스한 멜로디로 내 귀를 촉촉이 적셔주었다.














































19:10

오르골 당에서 충분히 몸을 녹이고 다시 오타루 시내를 돌아보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해는 이미 저물어 있었다. 해가 진 거리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로맨틱한 색으로 덧칠된 느낌이랄까. 거리 전체가 그러한 톤으로 변해 있었다. 그에 못지않게 추위 또한 더욱 짙어져 있었다. 간간히 내리는 눈 사이로 차가움 만이 가득 들어찬 느낌이었다. 메르헨 교차로를 시작으로 사카이마치를 지나 오타루 데누키코지까지 걸었다. 데누키코지는 술 한 잔 걸치기에 걸맞은 분위기 좋은 식당과 술집으로 이루어진 골목이었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모든 가게가 문이 닫혀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곳에서 저녁을 먹을 생각이었는데, 문이 열려 있는 곳은 정말로 단 한 곳도 없었다. 낯 선 도시에 와서 문이 닫히 술집 골목을 홀로 걷는다. 춥고 허기가 지긴 했지만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아무도 없는 골목을 걸으며 따뜻하게 몸을 녹여줄 식당을 생각했다.


오타루 운하를 다시 찾았다. 이 곳 역시 낮에 왔을 때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운하는 먹을 풀어놓은 듯 검푸른 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그 위로 관광객을 실은 배가 유유히 내 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산책로 가로등에는 일루미네이션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고, 하늘에서는 새하얀 눈이 쉬지 않고 내려왔다. 산책로를 다시 한번 걷고 나서 저녁을 먹기 위해 예전에 창고로 쓰였던 운하 옆 식당에 들어갔다. 창가 자리로 안내를 받았다. 함박 오므라이스와 맥주 한 잔을 주문했다. 식사를 기다리면서 빼꼼히 뚫린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곳으로 운하의 모습이 간신히 들여다 보였다. 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가며 이런 생각을 했다. 오타루는 낮보다 밤이 어울리는 도시다. 그리고 혼자 보다는 둘이 어울리는 도시. 언제가 혼자가 아닌 둘이서 이 밤거리를 걷기 위해, 나는 다시 이곳 오타루를 찾게 될이다. 그때가 언제가 될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청춘 18 2일 차 경로>

토마코마이항(6:46)----중앙 버스---->(7:00)토마코마이(7:26)----치토세 선---->(8:34)삿포로(13:28)----하코다테 본선---->(14:07)오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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