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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와분노 Jan 17. 2021

영화 속 장애인과 장애를 안은 개인의 삶

오아시스, 이창동,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이누도 잇신


 이창동의 <오아시스>에 대해 어떤 분이 개봉시점에 쓴 글을 본적이 있다. 

 그 분은 본인이 장애인이라고 밝히면서 장애인 영화로서 <오아시스>를 기대하고 관람했으나 크게 실망했다고 했다. 실망한 지점은 두 곳인데

 첫째, 공주가 지능에는 장애가 없는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분류됨에도 불구하고 자기 아버지를 교통사고로 죽이고 자신을 강간하려 한 종두를 바보처럼 다시 집안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이다.(실제 교통사고를 일으킨 장본인이 종두의 형이기는 하다.)

 둘째, 공주가 지능에는 장애가 없는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분류됨에도 불구하고 연인 종두가 누명을 썼는데 바보처럼 속수무책으로 그의 출소를 기다리는 장면으로 영화가 끝나버렸다는 점이다. 

 그래서 결국 감독이 ‘장애인이라는 사회적 규정이 아니라 다만 관객이 쉽게 동일화하기 어려운 인물이다.’라는 식으로 종두와 공주를 설명했음에도 그 분은 이 영화가 지능에 장애가 없는 뇌성마비 장애인마저 바보처럼 여기는 사회적 편견에 동참한다고 봤다는 얘기였다. 나는 그 분이 쓴 글의 취지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것 같다. 나도 그 영화의 엔딩이 모호하고 안이한 측면이 있다고 느꼈다. 

 그런데 생각을 달리하는 부분도 있다. 

 <오아시스>가 장애인을 등장시키지만 정확하게 장애인에 대한 영화는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관객은 영화의 시작부터 장애인 공주를 목격할 것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다보면 장애인이라는 단어로 포괄할 수 없는 공주 개인의 삶 또한 목격하게 된다. 장애인이라는 사회적개념이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개인의 삶을 전부 설명하지는 못한다. 장애인이 아닌 공주라는 사람도 존재한다. 그런 인식의 간격을 영화는 노골적으로 표현하기까지 한다. <오아시스>는 관객이 공주를 단지 장애인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다만 공주로 바라보기도 하는 서로 다른 시선이 엇갈리도록 유도하는 영화다. 만약 그렇지 않고 <오아시스>가 장애인에 대한, 장애인을 위한, 장애인 영화였다면 어땠을까?

 종두가 강간미수범 따위가 아니라 공주입장에서 충분히 똑똑하게 사랑할 법한 도덕적정당성을 부여받은 남자였더라면. 공주가 연인에게 씌워진 누명을 사회적 편견에도 불구하고 똑똑하게 극복했더라면. 그랬다면 그 영화는 아마 똑똑하게 사회적 편견에 저항하는 정치적으로 도덕적으로 흠 잡힐 것 없이 대다수가 찬성하는 올바른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동시에 더욱 감동적인 영화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동시에 장애인이란 소재를 활용해 관객들의 눈물을 짜내는 더욱 순결한 신파가 될 수도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영화 속의 그들은 오직 선하고 억울하고 불쌍하니까. 그런데 <오아시스>는 그 길을 가지 않았다. <오아시스>는 ‘장애’를 영화 속 인물들이 겪는 부조리한 삶의 조건으로 설정했다. 그 인물들의 선택은 관객이 쉽게 동일화할 수 없는, 찬성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한 선택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그 분께서 <오아시스>에 실망했던 이유는 같은 장애인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다른 관객들과 마찬가지로 쉽사리 그들을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건 정확히 영화가 목적했던 바이다. <오아시스>에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라는 ‘벽’ 뿐만 아니라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이해하는데 있어 부딪히는 ‘벽’ 또한 존재한다. <오아시스>의 공주와 종두는 바로 그 이중의 ‘벽’에 둘러싸인 주인공들이다. 



 원래는 <조제...>에 대한 얘기를 쓰려 했는데 바보처럼 스텝이 꼬여버렸다. 

 하지만 이런 걸 일일이 설명해서 정말 설명이 될지도 확신이 안 든다. 왜냐면 어떤 영화든 사람이든 나만의 도덕적 잣대로 판단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그 사람은 그렇게 볼 수밖에 없다. 그 사람에겐 조제가 바보처럼 츠네오에게 의존하지 않고 바보처럼 차이지도 않고 똑똑하게 씩씩하게 성장하고 극복하는 영화가 훨씬 훌륭하고 올바를 수 있다. 근데 그 영화는 앞서 말했듯 전혀 다른 의미의 영화이다. 

 <조제...>의 조제는 등장할 때 비록 ‘장애인’이라는 보통명사였을지라도

 영화가 끝날 무렵 어떤 관객들의 맘속에는 ‘조제’라는 고유명사로 자리 잡게 된다. 그 무렵 그 관객들은 장애인과 일반인의 연애라는 범주를 넘어 ‘조제’와 ‘츠네오’의 연애로서 그들을 바라보게 된다. 알고 보니 장애인도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이었어, 란 식의 그야말로 바보같은 깨달음이 아니라 그냥 그들에게 공감하고 감정이입했을 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런데 왜 나는 지금 자연스러운 걸 설명하고 있는 것일까? 



참고기사: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0087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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