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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와분노 Jan 17. 2021

걸스 캔두 애니띵? <더 위치>

로버트 에거스, 2015


 우리가 무엇을 위해 이 황무지로 왔단 말이오

 우리의 나라와혈육과우리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우리는 거대한 대양을 건너왔소뭣 때문에무엇을 위해서?


 영화가 시작되면, 화면 밖에서 낮고 중후한 음성이 울려 퍼지며 화면에는 그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는 토마신의 모습이 비춰진다. 다음으로 그녀의 남동생, 켈럽이 비춰지고 


 다음은 더 어린 쌍둥이 동생들, 조나스와 머시


 그들(토마신, 켈럽, 조나스, 머시)의 아버지 윌리엄은 줄곧 말하고 있다. 아직 화면으로 들어오지 않은 윌리엄은 이 회의장, 일종의 심판이 이뤄지는 가운데 심판자들에게 항변한다. 우리가 이 땅에 온 이유는 복음의 순결과 신실한 나눔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서가 아니었냐고. 그러나 심판자들은 조용히 하라 다그치고 교회와 법을 모욕하면 우리 농장에서 추방당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회의장을 채운 마을 군중들도 침묵으로 경고에 동참한다.


 네 명의 자녀 그리고 아내 캐서린과 그녀 뱃속의 막내까지... 여섯 명 가족을 이끌고 여기 선 ‘가장’ 윌리엄은 그들의 경고에 굴복하지 않고, 그들의 추방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여기까지 영화의 첫 신만 제대로 얘기해도 <더 위치>에 대한 소개는 충분할 것이다. 윌리엄 가족을 추방하려는 마을 공동체는 1630년 미국 뉴잉글랜드를 배경으로 한다. 그 역사적 배경까지 고려하면 그들 공동체도 종교적 핍박으로 영국에서 추방당하다시피 해 뉴잉글랜드 지역에 정착했던 것이다. 결국 신앙을 위해 영국에서 건너온 청교도들이 세운 마을공동체에서 다시 윌리엄 가족은 신앙을 위해 마을 밖의 숲으로 이주하게 된다. 그러므로 <더 위치>는 17세기 뉴잉글랜드 청교도사회의 시대적 프레임을 영화 속 윌리엄 가족의 미니멀한 프레임으로 함축한 영화이다. 더 나아가 1692년 뉴잉글랜드 메사추세츠 주에서 발생했던 세일럼 마녀재판 기록과 그 밖의 민간설화, 자료를 바탕으로 당시 사람들의 공포를 ‘윌리엄가족’의 공포로 재현한다는 게 <더 위치>의 기본적인 컨셉이다.


 2015년 이 영화로 장편 데뷔한 로버트 에거스는 뉴잉글랜드 출신으로서 어린 시절부터 자기 동네의 ‘마녀이야기’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그밖에 민간설화나 신화, 동화, 문헌들도 탐닉했고 아트디렉터로도 일했었기 때문에 문헌기록과 디테일한 고증에 대한 집착은 그의 두 번째 장편 ‘라이트하우스’에서도 엿볼 수 있다.  

 나는 수년 전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매우 리얼리스틱한 시대극 묘사(의상, 주거, 소품 등 미장센은 말할 것 없이 고어투의 대사까지)에 구체적인 오컬트 이미지가 결합돼 있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알고 보니 그 오컬트의 이미지들도 리얼리스틱해서 구체적이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마녀가 처음 나오는 장면은 당시 마녀에 대한 설화, 기록에 근거해, ‘세례 받지 않은 아기’를 약초와 함께 빻아서 그 정제된 지방을 온몸에 바른 마녀는 밤하늘로 떠오른다든지... 

 한편으로는 리얼리즘과 오컬트를 결합시킴에 있어 문화적인 맥락 뿐 아니라 영화사적? 맥락도 느껴진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특히 <더 위치>만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진입단계에서 큐브릭과 <샤이닝>의 자취는 선명했다.

 

 히스테릭한 현악연주로 긴장을 고조시키다 정적뿐인 숏으로 전환한다든지... 윌리엄가족이 새 정착지에 이르러 숲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위 장면에서는 <2001스페이스오딧세이>의 검은 비석에게서 흘러나왔던 ‘영혼의 울음소리’가 흡사하게 반복된다. 이미지도 <샤이닝>에서 위압적인 자연경관을 통해 오버룩호텔의 음산한 기운을 전달했던 것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 그런데 이런 표현뿐 아니라 리얼리즘과 오컬트를 연결하는 좀 더 깊은 층위에서도 <더 위치>는 <샤이닝>의 과정을 따르고 있다.   


 아직 피쉬한 이목구비가 도드라지지 않은 안야 테일러 조이, 극중 토마신의 얼굴이다. 이 영화를 보았다면 그녀의 지금 표정이 뭘 뜻하는지 그리고 다음 숏이 뭐였는지도 기억할 것이다. 기억 안 나면 영화를 안 봤을테니 여기서부터 ‘스포일러’임을 알린다. 


 ‘Peek A Boo’라고 하나? 토마신이 막내아기 ‘샘’과 까꿍 같은 걸 하다가 바로 다음 숏에서 샘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알다시피 비극은 여기서 부터다. 관객은 이 황당한 실종에 토마신의 잘못이 없음을 알지만 토마신의 가족들은 그렇게 확신할 수 없다. 그래서 의심하게 된다. 특히 토마신의 엄마, 캐서린은 노골적으로 토마신을 탓한다. 못된 쌍둥이 동생 조나스와 머시도 토마신 탓이라며 놀린다. 반면 그녀의 남동생 켈럽과 아버지 윌리엄은 토마신을 감싸면서 이 가족은 파벌화되는 모습까지 보인다. 문명사회라는 더 큰 울타리로부터의 고립에 흉작까지 겹치며 가족 내 잠재했던 갈등과 원한이 드러나고 토마신은 점점 마녀로 몰리며 가족이라는 작은 울타리 안에서도 고립된다. 이 과정에서 진짜마녀, 초자연적 존재의 개입은 절제되어 필요한 곳에서만 그들의 반목을 부추기는 역할을 한다. 아무리 무고한 토마신이라지만 가족 모두에게 의심받아 완벽히 고립되자 자기도 모함을 해 쌍둥이 동생들이 염소와 대화했다며 몰아붙인다. 그러다가 결국... 이 가족은 자멸하다시피 파멸하고 혼자서 살아남은 토마신은 진짜마녀가 돼버린다.    

   

 잭 토랜스(잭 니콜슨)의 귀여운 함박웃음. <샤이닝>을 봤다면 역시 다음 숏이 뭐였는지 대충 기억할 것 같다. <더 위치>의 바로 다음 숏에서 마땅히 있어야 할 존재, 샘이 사라져 버렸다면 <샤이닝>의 이 다음 숏에서는 마땅히 없어야 할 존재 ‘바텐더’가 잭을 마주보고 서 있다. 

 바텐더는 잭의 눈에만 보이는 환영이거나 초자연적 존재다. 이 영화에서 잭이 처음으로 목격하는 환영 또는 초자연적 존재다. 그럼 잭이 바텐더를 만나기 전,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되짚어 보자. 잭의 아들, 대니가 멍투성이가 되어 엄마 웬디 앞에 나타났고 웬디는 곧장 잭을 의심했다. 관객은 알고 있다. 잭이 과거에 술에 취해 대니에게 물리력을 행사했고 또 꿈속에서 가족을 죽인 적은 있어도 현실에서는... 적어도 영화의 비극이 본격화되는 이 최초의 순간만큼은 그가 무고했다는 것을. 대니는 룸 237호에서 역시 초자연적 존재에게 당한 것이다. 역시 이 영화에서도 초자연적 존재는 현실의 가족을 농락해 가족 내 잠재된 갈등, 원한을 부추기는 역할을 한다. 또 마찬가지로 문명사회라는 더 큰 울타리로부터 고립된 오버룩호텔, 가족이라는 작은 울타리 안에서마저 이중으로 완벽하게 잭 토랜스가 고립된 시점부터 초자연적존재는 그에게 본격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샤이닝’의 원작자 스티븐 킹이 큐브릭의 <샤이닝>을 싫어했던 중요한 이유는 큐브릭이 초자연적존재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무시한다는 거였다. 그 말인즉슨 큐브릭의 <샤이닝>이 영화 속 초자연적존재를 환상적 이미지로 치부해버려도 어느정도 현실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바로 그 모호함, 영화 말미까지 완벽한 현실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벽하게 확증된 초자연적존재도 아닌 리얼리즘과 오컬트 간의 묘한 밸런스 덕분에 <샤이닝>은 그로테스크하고 언캐니(uncanny)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점프스케어에 놀라 쫓고 쫓기는 대신, 현실인지 초현실인지 확신할 수 없는 불안감이 영화의 상당량을 채우게 된다. 이런 텐션으로 영화를 끌고 가며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점은 영화속 가짜공포에게 쫓겨다니는 대신 영화밖 진짜공포를 상기시키며 그 공포의 현실적인 근원을 사유하고 파고들 여지가 생긴다는 것이다. 

 로버트 에거스의 <더 위치>는 조금 더 분명하게 초자연적 존재가 마녀로서 실체를 드러낸다. 하지만 초당27프레임의 그 신비로운 이미지는 윌리엄가족의 현실과 다소 괴리되어 있고 절제되어 있고... 영화말미까지 가족구성원 각자가 1대1로 마주칠 뿐이다. 그러니까 2명 이상이 마녀를 만나면 제3자의 시선으로 초자연적 실체가 객관화되기 때문에 환상적인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 


 윌리엄가족의 쫄딱 망한 농사의 흔적. 옥수수는 맥각병에 걸린 것처럼 보이고 맥각이라는 균은 환각을 유발할 수 있다고 한다. 이조차 고증을 거쳤다면 영화 속 리얼리즘과 오컬트 간의 밸런스는 더욱 미묘해진다. 그리고 더 중요한 점은 (위에서 말했듯) 윌리엄가족의 비극도 현실적 측면에서 충분한 동기와 원인을 가진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어느정도 현실적으로 해석 가능한 비극이며 그래서 이 영화의 무서움은 마녀의 이미지보다 그 마녀의 이미지로 유린당하며 서로 불신하고 폭로하고 죽이고 죽임당하는 가족의 모습이다. 관객은 그걸 지켜보며 현실적으로 사유할 수 있기 때문에 영화 속 공포는 영화 밖까지 유의미해지고 현실적인 담론까지 가능해진다. <샤이닝>과 <더 위치>에서 리얼리즘과 오컬트 간의 균형을 통해 추구했던 핵심은 바로 그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바로 그 현실적인 담론이라는 것은 뭘까? <더 위치>는 영화 속 공포를 통해서 영화 밖의 어떤 공포와 닿으려고 했던 것일까? 


 <세일럼 마녀사냥>

 간단히만 요약하자면 1692년 뉴잉글랜드 메사추세츠 주 세일럼 시에서 실제 마녀사냥과 마녀재판이 일어났다. 어느 청교도 목사가 발작과 이상증세를 보이는 딸과 조카를 의사에게 데리고 왔고 의사는 증상이 완화되지 않자 마을에 숨어 있는 마녀들 때문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그로부터 누가 저주를 내렸냐는 추궁이 가해지며 노예출신 하녀가 먼저 지목되었고 이후로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서로를 마녀라고 모함하고 고발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나중에는 유력가문끼리 정적제거를 위해 마녀사냥을 활용하기까지 했다. 여자 13명 남자 6명이 참수당하고 남자 한 명은 압살 당했다고 한다. 

 그들은 진짜 마녀였을까? 지금으로서는 답이 뻔한 질문이다. 내가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연도다. 1692. 이 글 초반에 얘기했듯 <더 위치>는 이 사건의 법정기록까지 참조하여 이 일련의 사회적공포라는 프레임을 윌리엄가족이라는 프레임으로 축소, 극화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윌리엄가족의 공포, 비극은 1692년보다 62년 앞선 1630에 위치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마치 이 픽션이 팩션 같은 뉘앙스로 62년 후의 더 광대한 비극을 예고하는 징후로 자리잡게 된다. 예를 들어 미카엘 하네케의 <하얀 리본>이 이후의 파시즘을 징후하는 영화였던 것처럼.         

 하지만 한편으로는 원인에서 결과가 나왔는데 그 결과가 다시 원인으로 환원되는 건 당연하다. 그러니까 세일럼 마녀사냥에서 착안한 이 영화가 다시 그 세일럼 마녀사냥을 말하고 현실담론화하는 게 전부였다면... 그런 문제의식과 테마는 순환적이고 딱히 현실적이지도 않다. 더군다나 내가 이 영화를 처음 볼 무렵은 세일럼 마녀사냥 같은 건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공포가 62년 후가 아닌, 수백 년 후의 오늘날까지 징후하려는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그런 인상이 비롯된 배경을 어설프게나마 도식화해본다면 다음과 같다. 

A: (영화 밖) 종교적 억압으로 영국에서 이주해 뉴잉글랜드에 정착한 공동체

B: (영화 속) 종교적 억압으로 공동체에서 이주해 숲 근처 정착한 윌리엄가족

C: (영화 속) 윌리엄 가족의 억압(마녀사냥)으로 숲에 들어가 마녀가 된 토마신

D: (영화 밖 과거) 62년 후 실제 벌어진 억압, 세일럼 마녀사냥과 마녀재판

E: (영화 밖 현재) 수백 년 후 ???

 억압의 계승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이 도식에 나는 E의 빈 자리를 메우는 또 다른 억압을 이 영화가 징후하는 인상을 받았다. 에두르지 않고 말하자면 일종의 여성주의적 맥락이랄까? 물론 당시에도 이 영화가 어떤 주의나 이념을 표방한다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이 영화에 현재의 여성주의적 시선을 발견하려 한다면, 일단 그럴만한 여지는 존재한다고 봤던 것이다.


 <걸스 캔두 애니띵?>

 토마신은 코르셋의 끈을 풀어헤치고 그것을 벗어던진다. 그녀는 방금 엄마를 죽였는데 물론 엄마가 먼저 그녀를 죽이려고 했기 때문이다. 엄마도 아빠도.. 동생들도 모두 다 죽거나 사라졌고 사악한 가족은 전멸했다. 혼자 남은 그녀는 이제 가족이라는 울타리, 그녀를 억압하고 핍박하는 우리로부터 풀려났다. 


 염소 ‘블랙필립’이 토마신에게 질문한다. 

 뭘 원하는데?

 뭘 줄 수 있는데? 토마신이 되묻는다. 

 버터의 부드러운 맛 같은...

 블랙필립이 말한다. 

 예쁜 드레스 같은...

 블랙필립이 말한다.

 달콤한 삶을 원하니?

 블랙필립이 질문한다. 토마신은 대답한다. 그래. 

 토마신은 염소 블랙필립과 함께 숲으로 걸어간다. 모닥불을 둘러싼 마녀들이 기다리고 있다. 벌거벗은 마녀들이 밤하늘로 떠오르고 그들과 더불어 새로운 우리에 속한 토마신도 밤하늘로 자유롭게 떠오른다. 



 앞서 도식에서 D: 세일럼 마녀사냥은 이 영화의 착안점에 가깝기 때문에 이 영화를 감상하는 관객 입장에서는 덜 중요할 수 있다. 수백 년 전의 과거를 잘 모르고 깊게 관심 가지지 않더라도 관객 자신의 현실과 현재에 공명하는 E의 빈자리가 더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E의 빈자리에 여성주의적시선을 놓고 보려는 글들 또한(영어를 잘 못해 네다섯 개 정도만 훑어봤지만 그 글속에서도 이 영화에 대한 이런 시선이 꽤 광범위하다는 걸 확인) 세일럼 마녀사냥보다는 토마신이 여성으로서 가부장제에 의해 억압당하고 해방되는 과정에 주목한다. 숲에 들어가 마녀가 되는 엔딩에 대해서는 여성이 권력을 쟁취하는 feminist narrative 또는 empowerment narrative로서 <더 위치>를 호평하고 담론화 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런 관점에 나는 최소한 절반 정도는 동의할 수 없다. 앞서 말했듯 여성주의적 맥락을 발견할 순 있다. 하지만 그 맥락을 여성주의적 시선으로, 해방으로서 긍정으로서 바라보려는 관점은 일단 이 영화와 어울리지  않는다. 리얼리즘과 오컬트의 밸런스를 통해 그로테스크하고 언캐니한 무드로 일관했던 이 영화는 쉽게 형언할 수 없는 뭔가를 끝내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쪽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부장제의 억압을 강조하기에 이 영화의 가부장 ‘윌리엄’은 적합한 캐릭터라고도 볼 수 없다. 물론 이 모든 사단의 원흉은 그의 고집이었고 그의 외모와 목소리가 광신도처럼 비춰질 수도 있다. 허나 따지고 보면 종교가 모든 일상과 이념과 도덕을 지배하던 시대에서 그 가치관에 지나치게 고지식했던 인물일 뿐이다. 그마저도 자식들이 죽어나가자 실패를 인정하고 농장으로 돌아가려는 모습을 보인다. 윌리엄은 <샤이닝>의 잭 토랜스처럼 가부장의 공포를 극단화하는 캐릭터가 될 수 없다. 근처에 가기에도 부족한 면이 있다. 오히려 자식을 잃고 비탄에 빠진 그의 아내 캐서린이야말로 농장으로 돌아가는 것도 마다하며 일찍이 광기에 사로잡히는데, 사실 그녀가 토마신에게 가장 적대적인 인물이다. 토마신의 입장에서는 엄마 캐서린이야말로 마녀처럼 비춰질 수 있고 더 나아가 캐서린은 현대적인 여성이 결혼해서 자기도 저렇게 되지는 않을까, 두려워하는 그 모든 악몽의 집합체이다. 가난과 궁핍, 고된 양육과 가사노동, 성적매력이라곤 탈수된 듯한 인상, 불행과 절망과 예쁜 딸이 남편을 유혹할까 경계하는 히스테리까지...

 한 번 더 <샤이닝>에 빗대자면 토마신의 아버지 윌리엄이 대니와 투쟁했던 잭 토랜스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토마신의 어머니, 캐서린이라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더 위치>의 프로타고니스트가 아니기에, <더 위치>의 프로타고니스트는 토마신이고 사실 그녀야말로 대니처럼 핍박받는 동시에 또 잭 토랜스처럼 고립되어 초자연적 존재와 밀접해지는 인물이다. 무고하게 누명쓰고 억압당하면서 한편으로는 점점 내부의 어두움을 성장시켜가는 인물이다.

 여기서 또 한 번 더 앞서 A, B, C, D, E의 도식까지 끌어와 영화 자체로만 수렴하는 A, B, C만을 남겨두었을 때, 거기서 하나의 패턴을 발견할 수 있다. 억압의 대상(청교도인)이 억압의 주체(마을공동체)가 되고 또 그 억압의 대상(윌리엄가족)이 토마신에 대한 억압의 주체가 되는 억압의 계승이라는 패턴을 따라왔을 때, 그렇다면 다음 순서는 누구인가? 누가 새로운 억압의 주체가 될 수도 있다고 이 영화는(혹은 내가)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는가?

 솔직히 나는 이 영화의 여성주의적 맥락을 위 문단처럼 받아들였던 게 맞는 것 같다. 그걸 굉장히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을지라도 어렴풋하게나마 이 영화의 뉘앙스는 그쪽에 가까울 거라고...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한 여성주의적 담론들을 발견했을 때 차라리 그 완곡한 반대거나 또는 feminine darkness, 여성적인 어두움을 암시하는 쪽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로버트 에거스는 자기 영화를 feminist의 성장이나 empowerment narrative로 바라보는 질문에 대해 그런 의도는 없었다고 밝힌 적 있다. 자신이 거리를 두고 객관화해 바라보려는 모든 테마들 중 최상단에 feminism이 있다는 말까지 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In all of my trying to stand back and be objective about themes, feminism rises to the top,”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에게 보여진 영화는 관객들의 영화이기도 하기에, 그것으로 <더 위치>에 대한 feminism담론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언급한 feminine darkness도 마찬가지인데 나는 한 영상인터뷰에서 그 말을 여성인터뷰어가 언급한 걸 본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영화가 feminism에 대한 약간의 경계하는 뉘앙스가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보기도 했는데 솔직히 지금 한국이나 미국에서 그런 영화를 만들기는 어렵다고 본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바로 그런 현실 때문에 내가 이 영화에서 feminine darkness를 느꼈던 것일 수도 있다. 처음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땐 영화가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과정을 내 나름 다루며 그것과 자연스럽게 이어서 영화의 여성주의 담론을 반박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하지만 글을 마무리하며 나 자신부터 돌이켜보니 내가 이 영화에서 느꼈던 feminine darkness에 대한 불안 같은 것이 모이고 모인다면 그 또한 다수의 마녀사냥으로 활용될 소지가 있다는 경각심이 생긴다. 마녀사냥은 언제나 있다. 누구나 가능하고 누구나 당할 수 있다. 남자든 여자든 간에 말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가 마지막까지 불안해하고 두려워했던 다음 억압의 주체, 현실의 주체는 꼭 토마신 뿐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무고하게 누명쓰고 억압당하고 핍박당했던 자라 할지라도 누군가를 무고하게 몰아세우고 억압하고 핍박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남자든... 여자든... 부자든... 가난한 자든... 누구든 가능하다. 그렇다면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더 위치>의 마녀사냥과 다수에 의한 억압은 계승되고 또 순환한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윌리엄이 심판자들 앞에서 했던 말을 떠올린다면 우리가 이 땅에 온 이유는 무엇인가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왔는가왜 영국을 떠나 뉴잉글랜드로 정착했으며 왜 가족을 등지고 숲으로 들어갔는가핍박받고 억압당하던 자들은 왜무엇을 위해 여기까지 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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