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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와분노 Jan 17. 2021

두 번 벗기기 <누드모델>

자크 리베트, 1991


1. 원제는 La Belle Noiseuse... 어떻게 발음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에서 대충 듣긴 했는데. 영어제목으로는 아름다운 트러블메이커? 원제도 비슷한 의미였다. 싸우는 여자? 호전적인 여자? 투쟁적인 여자? 


2. 발자크 소설 원작, 자크 리베트 연출, 91년 칸에서 대상받았다고 한다.


3. 발자크, 자크 리베트, 칸 이런 것들은 내가 이 영화를 찾아보게 된 계기와 무관하다. 이 영화를 봤던 건 <마농의 샘>이나 <겨울의 심장> 같은 영화들에서 다소 짜증날 정도로 아름다웠던 에마뉴엘 베아르 때문이었다. 나는 그녀의 몸을 보고싶었다. 


4. 그러니까 그녀의 몸에 대해서 얘기하자. 4시간짜리 영화인데 그중 절반은 화실에서 화가 프뤼노페르가 100% 벗은 마리안느(에마뉴엘 베아르)의 몸을 그리는 장면들이다. 그러니까 그녀의 몸을 얘기하는 게 이 영화의 절반을 얘기하는 거라고 우길 수 있다. 


5. 그녀의 몸은 당연하게도 옷을 입었을 때와 다르다. 그런데 전체적인 인상이 달라진다. 약간 더 작달막해 보이고 피부는 연한 갈색이고 주근깨가 있고 몸의 선이 매끄러우면서 좀 투박한 느낌도 있다. 예민한 인격과 동물적인 노골성이 공존한다. 가슴과 엉덩이가... 추잡스런 표현해서 미안하지만 발기된 듯한 형태이다. 원제에 걸맞게 연출한 일부일 수 있지만 섬세하면서도 투쟁적인 에너지가 배어나는 몸이다. 


6. 아름다운가? 아름답다. 하지만 영화가 그녀 몸의 아름다움을 숭배하지는 않고, 영화 속 화가 프뤼노페르 또한 아름다움이 아닌 다른 것을 원한다. 프뤼노페르는 이미 눈앞에 벌거벗은 마리안느에 흡족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서는 아직 100%의 발가벗겨짐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한 번 더 벗겨내고 싶어한다. 벗기고 또 벗겨서 그 속에 있는 '진실'을 그림에 담아내고 싶어한다. 


7. 같은 누벨바그 세대의 감독, 고다르의 <비브르 사 비>에서는 8살 소녀가 썼다는 '새 이야기'가 나온다. 새는 동물이다. 새는 이 있는 동물이다. 겉을 지우고 나니 새의 속이 남았다. 속을 지우고 나니 새의 영혼이 드러났다. 대충 그런 얘기였는데 대충 그런 느낌이다. 벗기고 또 벗겨서 그 속에 감춰진 마리안느의 진실한 무엇을 그리려는 것이다. 


8. 멋진 얘기지만 그게 가능한 일인가? 잘 모르겠다. 그림에 무식해서 그럴지도, 적어도 그림을 폄하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얘기한다면, 소설 같은 경우 권여선 작가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많이 좋아해서 가끔씩 한달에 걸쳐 그 소설을 읽는다고 들었다. 그 말인즉슨, 작품의 독자가 한 달 동안 그 작품을 감상하고 사유하는 노력을 들이기에, 그만큼의 숨겨진 무엇, 진실한 무언가를 전달받기에 충분할지 모른다. 그림은 화가가 혼신을 다해 뭔가를 담아냈다 한들, 감상하는 입장에서는 직관적으로 그 중요한 뭔가를 전달받아야 하지 않을까? 그림 역시 그림에 따라 해석의 시간이 요구될 순 있지만 역시 그림과 순간적으로 공명하는 감상의 특성을 배제할 순 없을 것 같다. 어떻게 한 사람의 깊은 진실을, 그 내면까지 한 폭의 그림으로 반영하고 또 그걸 순간적이며 직관적인 시선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9. 아무튼 그런 의문을 품은 채 영화를 지켜보게 된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결과물을 기다리게 된다. 대체 어떤 그림이길래? 하지만 돌이켜보면 이 영화는 창작의 결과가 아닌 과정에 집중한 영화라서 결국 완성된 그림을 통해서가 아니라 완성된 영화 4시간을 통틀어 이해하고 느낄 수밖에 없다. 마리안느의 몸 속에 감춰진 마리안느는 대체 어떤 모습일까? 화가는 뭘 보았으며 마리안느는 무엇을 보게 될까? 그녀는 그림에 드러난 자기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10. 마리안느의 벗은 몸과 화가의 캔버스가 교차된다. 화가 프뤼노페르가 스케치북이나 캔버스에 붓질하거나 목탄을 휘두를 때 카메라는 거의 멈춰서 오랫동안 바라본다. 사실 그런 장면들이 신기하기도 하고 정적인 롱테이크에 민감하게 포착된 음향(펜으로 종이를 긋거나 붓질하는 소리) 덕분인지 은근 몰입감이 있다. 나는 이 영화에서 인물들이 움직이고 대화하는 장면보다 그냥 그림그리는 구경하는 장면이 더 재밌다고 생각한다. 


11. 마리안느(에마뉴엘 베아르)의 벗은 몸도 처음 볼 때는 설레기도 하지만 자꾸 보다보면 익숙해지기도 하고... 점점 저 피부 역시 외피에 지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녀의 '속'을 저 '겉'을 묘사해서 표현할 수 있을까...라며 점점 화가의 고민에 가까워지기도 한다. 또 추잡한 표현해서 미안하지만 결국 그녀의 몸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녀의 몸 속으로 파고들어가 그 속을 느끼고 이해하고 표현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화가 프뤼노페르가 처음 그녀를 그리고 싶어 안달하는 모습은 그녀와의 섹스에 안달난 늙은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중에 그가 그림에 절망하는 모습은 결국 그 섹스가 실패한 좌절마냥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왜 그는 절망하고 좌절했을까? 뭣 때문에 도중에 창작의 발기가 수그러들고 또 실패했다면서 포기하려 했을까?  


12. 화가 프뤼노페르는 이미 10년 전 같은 테마의 그림을 시도했었다. 바로 그의 아내 리즈(제인 버킨)을 모델 삼아서... 허나 최초의 Noiseuse는 실패했고 그 그림은 미완성으로 남았다. 프뤼노페르가 처음 마리안느를 그리려 했을 때, 나는 그가 마리안느를 젊은 시절의 아내에 대한 대체물로 바라보았다고 생각한다. 섹스에 빗대자면 눈앞의 여자를 끌어안고 다른 여자의 깊이를 찾아헤맨 것이다. 그러므로 그 깊이에 한계가 있다면 결국 머리속의 다른 여자는 지워버려야 한다. 여태까지 그림의 대상에 머물렀던 마리안느가 (실패에 대들면서 싸우는 여자답게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온전한 자기자신을 표현한다. 프뤼노페르는 그녀를 그녀로서 바라보고 그림을 다시 시작한다. 새 화폭에 낡은 시선을 들이대는 대신, 낡은 화폭을 낯선 시선으로 지워가면서...  


13. 이런 점에서 화실 안의 창작과정은 화실 밖의 인물들끼리의 관계에 대한 어느정도 은유적인 힘을 가진다. 화실 밖에선 프뤼노페르와 리즈라는 오래된 커플 그리고 마리안느와 니콜라라는 젊은 커플이 각각 평행선과 대각선으로 엇갈리면서 미묘한 갈등을 형성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림이나 예술 자체보다 '인간성'에 호기심을 느끼고 그래서 영화를 볼 때도 캐릭터에 집중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화실 밖의 드라마가 조금 덜 선명하게 다가왔던 것 같다. 영화는 그림을 그리거나 그밖의 예술이나 창작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확실히 더 흥미로울지도... 나도 어떤 그림 자체에 매혹된 적이 있기는 하다. 피에르 보나르의 그림인데 그는 수십 년 동안 동거한 연인의 그림을 반복해서 그렸다고 한다. 연인이 나이가 들어서도 젊은 시절의 그녀 모습을 화폭에 담아냈다고 한다... 그 그림이 떠올라 다시 들여다봤다. 그녀의 몸을 바라보며 그녀 몸속의 그녀를 발견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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