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위, 1997, 로버트 로센, 1961
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둘의 연애(戀愛)에서
아휘(양조위)는 얼핏 일방적인 피해자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보영(장국영)이 일차원적인 가해자로 느껴지지는 않음에도 말이다.
아휘는 내내 보영 때문에 상처받고 괴로워하고
보영이 없으면 없는 대로, 곁에 있으면 있는 대로……
둘 사이 완벽했던 시간은 스쳐가고 불완전한 관계가 곧 실체를 드러낸다.
골치 아픈 점은 그러는 동안 보영도 고통을 느끼고 슬픔을 느낀다는 것이다. 어쩌면 아휘보다 더... 엄살이라도 피우는 것일까? 다소 뻔뻔스럽게도 말이다. 하지만 어떤 관객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보영의 고통이나 슬픔이 곧 드러날 수밖에 없는 그의 불완전한 실체임을 느낄 것이다. 그는 그 자신의 가해자이기도 한데 자신이 아휘에게 끼친 피해까지 절감한다. 모르지 않는다. 모른 척, 모른다고 자신을 속일 뿐이다. 얼핏 터무니없는 논리로 비춰질 지도 모르지만 그럴 수 있다고 본다. 오직 둘만의 연애(戀愛)라는 논리 안에서는...
오직 둘만의 연애를 얘기함에 있어 가해와 피해라는 도식이야말로 좀 터무니없었을지 모르겠다. 그럼 좀 표현을 달리해서, 어쨌거나 아휘가 등신처럼 당한 건 맞지 않을까? 당한 건 맞는데 등신 같은 쪽은 아휘가 아니었던 것 같다. 정말 아휘가 보영이 어떤 녀석인지 몰라서 다시 시작하고 또 다시 시작하면서 시작은커녕 끝나갈 뿐인 관계를 미련토록 버텨왔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기에 아휘는, 모르는 게 아니라 아는 쪽이다. 보영 스스로도 잘 모르는 보영을... 둘이서 지지고 볶고 궁상맞게 함께해온 그 과거형 시간동안 그가 아무리 좆같이 굴었어도, 그는 어쩔 수 없게 자신이 아는 보영이라는 걸. 좆같이 오만하게 굴지만 실은 찌질하고 애처로운, 함께 살을 비비고 냄새 맡은 직관으로 그 불쌍한 녀석의 실체를 기억하는 것이다. 그래서... 갈 수 있는 데까지는 가 보자! 지구의 반대, 세상의 끝? 그 이과수 폭포까지만이라도 아휘는 보영과 끝을 가보고 싶었을 거라 추측한다. 보영은, 그는 언제나 끝이 아니라 시작을, 다시 처음부터라고 그게 가능한 마냥 우겨대던 녀석이었다.
‘방황 가득한’ 보영 내면의 정서는 같은 감독의 전작 <아비정전>의 ‘아비’를 떠올리게 한다. 역시 같은 배우가 연기했다. 그가 방황하며 탐닉하는 상대는 이성이 아닌 同性으로 바뀌었지만 그는 여전히 아비가 버릇처럼 얘기하면서 자조하던 ‘발 없는 새’의 영혼을 지속한다. 혹은 더욱 내밀화하고 있다.
“발 없는 새가 있지. 날아다니다가 지치면 바람 속에서 쉰대. 평생 딱 한 번 땅에 내려앉는데 그건 죽을 때지.”
아비가 또 그렇게 궁시렁대니 마주앉은 유덕화가 그런 얘긴 여자꼬실 때나 써먹는 거라며 핀잔주던 장면이 기억난다. 이 여자꼬실 때나 써먹는 ‘발 없는 새’ 이야기를 고다르의 <국외자들>에서도 본 기억이 난다. 하긴... 영화에서나 현실의 이 세계에서나 발 없는 새들은 도처를 떠돌아다닐지 모른다. 그리고 또 곰곰이 따져보니 ‘영화’라는 것 자체부터 이미 발 없는 새의 속성을 공유하는 것 같다. 그런 것 같다.
보영이 왜 그렇게 아휘에게 지랄했는지 또 왜 그렇게 자신에게 지랄했는지 그 이중의 가해와 겹겹의 피해를 이제 와서 이해해본다면
그 이전의 분신이 자조했듯 발 없는 새에게는 발이 없기(부정되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과 ‘여기’를 긍정할 수 없다. 부정해야만 한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는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가장 구체적인 진단이다. 모호하게 보일지언정) 그는 자신의 매혹적인 외모에 집착하며 오만하게 구는데, 왜냐면 그 날개마저 없다면 발 없는 새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그렇게밖에 그를 바라볼 수 없다. 남들보다 떠오를 수 있는 걸 통해서나 혹은 남들보다 추락하는 것을 통해서나, 그러지 않고 그냥 지면에 발붙이고 서 있는 자기 모습은 혐오스러워 견딜 수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보영과 아휘와의 관계, 연애 이전에 보영과 보영 자신과의 일그러진 관계, 절망적인 연애가 존재한다.(정도의 차이일 뿐 대다수가 그렇지 않을까?) 그러므로 나와 나의 일그러진 관계와 절망적인 연애는 나와 남 ‘지금 여기’의 관계와 연애에서 숙명적으로 일그러지며 절망적으로 재현, 반복될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지금 여기를 떠나 다른 어딘가로 날아가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본들 역시나 다시 재현되고 다시 반복되는…… 말하기도 지친다. 그도 지칠 것이다. 언젠가는.
문제가 있다. 문제는 여태까지 말해온 특별하면서도 평범할 수 있는 문제지만 또 다른, 훨씬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렇게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로 끝없이 끝을 향해 날아가다가도 문득 돌아보았을 때 그리워지고 마는 것이다. 이건 보영만의 문제이기 이전에 근본적으로 ‘시간’에 대한 문제이다. 그러니까 시간이야말로 ‘진짜 발 없는 새’이다. 끝없이 끝을 향해 날아가는... 그 끝없는 끝이 다가올 때까지는 절대 땅에 내려앉지 않고 절대 지치지도 않을... 보영은 지칠 수밖에 없고 지치기에 앞서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 왜냐면 가장 오만했을 때조차도 뭔가를, 별 것도 아닌 것(이라 여겼던 것들)을 아끼면서 간직해왔기 때문이다. 보영은 사랑했을 것이다. 자신을 미워했을 때조차도 자신을. 아휘를 미워했을 때조차도 아휘를. 어쩌면 자신보다 더 아휘를 사랑했을 수도 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아휘는 보영을 아껴주었으니까. 허나 당장의 혐오감(자신과 자기의 일부, 반쪽에게까지 전염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 멀리 날아왔고... 허나 멀리 날아가지도 못해 멀리 멀어져가는 ‘거대한 발 없는 새’ 시간으로부터는 뒤쳐질 수밖에 없고... 그래서 그는 뒤돌아보고 울면서 거꾸로 날아간다. 시간과 바람을 역행하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거라고 외치면서. 그는 시간과 달리 미래가 아닌 과거로, 끊임없이 회귀하며 작은 하늘을 맴도는 작고 초라한 새다. 그는 과거형의 인간이고 과거를 통해서만 온전히, 반쪽이 아닌 자신과 아휘를 사무치게 그리워하거나 엉엉 울면서 사랑할 수 있다.
물론 보영만 그렇다는 게 아니다. 먼저 말했다시피 ‘정도의 차이일 뿐’ 그의 비극은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되며 사람들 대부분은 작고 초라한 새의 속성을 공유한다. 시간을 흉내 내어 발 없는 새처럼 날아가다가도 그리움에 못 견뎌서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그 각자의 기억들은 때로 주관적인 청승맞음의 성질을 띠기도 하는데 그 결과 옆을 지나가던 다른 새의 시점에서는 좀 오글거리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자기 것의 기억에 좀 청승맞거나 오글거릴 권리는 있다고 본다. 누구에게나 자기 삶을 사랑할 권리 정도는 있기 때문에. (비록 그 사랑이 대개 온전치 못해 항상 뒤늦게 완성되고 말지라도) 이 권리를 위해 바로 ‘영화’가 태어난 것이 아닐까라고 나는 가끔 제멋대로 추정해보기도 하는데... 그 추정을 밀어붙이자면 바로 그런 영화들 가운데서 가장 당당하게 자기 것의 기억에 청승맞고 또 아름답게 오글거리는 게 다름 아닌 왕가위의 영화일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난 세기의 세기말…… 자신들의 작은 나라가 정말이지 ‘끝’에 임박한 나머지 그 거역할 수 없는 ‘시간’ 거대한 발 없는 새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그래서 그의 영화들은 그보다 훨씬 작고도 초라한 새, 개인들의 통속적인 애정서사로 가장 아름답게 당당하게 그리워하고 청승을 부렸는데 그건 쪽팔린다기보다 쪽팔리게 지나온 사랑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진심이었으리라. 그의 영화들은 과거형의 내레이션과 화면 사이 글귀 같은 과거형의 독백들과 함께해왔다. 화면 속 ‘새와 새가 슬쩍 스치는 찰나’와 ‘외따로 남겨진 새의 순간’을 영화만의 시간으로 왜곡했다. 그렇게 해서나마... 그 개인들의 진심을 포착하고 붙잡아 영화가 부질없이 시간에 저항하는, 역시 부질없으면서 진심어린 고백이었을지 모른다.
이 영화에서도 아휘의 과거형 독백이 화면 속의 과거와 함께한다. 화면에서는 아휘와 보영이 만나고 헤어지고 각각이 따로 남겨지는 순간들이 멈칫거리거나 더뎌지는데 그 찰나의 감정들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이다. 당시는 놓쳤더라도 이제 와서라도 붙잡고 싶어서이다. 보영이 시계를 돌려받겠다고 또 찾아왔을 때 아휘가 시계만 던져주고 내빼려 하자, 담배 한 개비를 부탁하면서 보영은 그를 멈춰 세운다. 담배를 입에 물고 아휘의 담배에 마주대서 불을 붙이는데 보영이 빨아들이는 그 작은 불빛과 한 모금의 온기, 아휘로부터 전해진 그것을 붙잡으려 화면 속의 시간은 미세하게 느려진다. 그가 돌려받은 시계의 초침도 잠시나마 걸음을 늦추었을 것이다. 허나 잠시에 불과하고(과거를 기억하려는 마음과 영화만이 가능한 그 마법은...) 아휘는 ‘다신 찾아오지 말라’며 내뱉고 뒤돌아서 걸어간다. 남겨진 보영은 담배를 문 채 허공을 응시한다. 그렇다면 그 순간과 찰나를 늦추었던 그리움은 먼저 보영의 몫이었으되 다음은 아휘의 몫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애써 그의 그리움을 무시했지만 훗날 아휘는 보영의 그리움을 이해하며 또 그리워했을 테니까. 영화의 틈틈이 낯선 이국의 도시를 내려다보는 전광판 시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계속 빠르게 멈추지도 지치지도 않고 끝없이 끝을 향해서만 날아간다. 보영은 피투성이가 되어 다시 아휘의 집으로 찾아왔다. 그는 자신의 ‘양 날개’를 다쳤는데, 의도했건 안했건 그러는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래야 아휘가 자신을 다시 받아줄 테고 또 그렇게 날개를 망가뜨려서라도 새는 그의 곁에 머무르고 싶었으니까. 그리하여 훗날 두 사람 각각 그리움에 울음 터뜨리게 할, 가장 행복했던 과거가 완성되었다.
<해피투게더>보다 더 오래전의 영화를 한 편 덧붙이고 끝내도록 하겠다.
1961년 로버트 로센이 연출하고 폴 뉴먼, 파이퍼 로리가 주연한 <허슬러>
그 영화에서 젊고 잘 생긴 폴 뉴먼은 내기당구 도박꾼인 ‘에디’를 연기한다. 당구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에디는 동료 찰리와 여행하며 호구들 돈을 털다가 미네소타 뚱보라는 라이벌과 거금을 걸고 당구시합을 벌이게 된다. 실력으로만 본다면 충분히 이길 수도 있었겠지만 결국 에디는 패배한다. 미네소타 뚱보의 뒤를 봐주는 ‘버트’라는 물주가 말하기를 에디는 ‘타고난 루저’이다. 잘 생기고 재능은 있을지언정 자존감과 자신감은 결여된, 그래서 오만함과 열등감 사이를 오가다가 자기 자신을 통제 못해 멘탈부터 털려버리는... 어쨌거나 빈털터리에 혼자가 된 에디는 낙심한 채 방황하다 버스터미널에서 사라(파이퍼 로리)라는 여자를 만난다. 사라는 한 쪽 다리를 저는데, 가족으로부터도 버려진 채 혼자 살아가는 여자다. 에디와 사라는 첫눈에 서로가 비슷한 종류의 인간이라는 걸 알아봤던 것 같다. 에디는 자신의 당구실력으로 언젠가는 지금 여기를 벗어나 멀리 날아가기를 꿈꿨으나 당장은 절망에 빠진 가난뱅이에 불과하고... 사라는 아침부터 홀로 술집을 옮겨 다니며 술을 마신다. 그녀도 지금 여기를 벗어나고 싶지만 날 수 없어서 술이라는 나름의 비행(飛行)을 택한 것이다. 에디는 사라 집에서 그녀와 동거한다. 근데 진지한 연인이라기보다 종일 틀어박혀 술이나 섹스로 함께 도피하는, 그러다가 잠시 후면 각자 헤어져버릴 두 마리의 작고 초라한 새였을 것이다. 어느 날 에디는 동네 술집에서 간만에 호구들을 상대로 내기당구를 벌인다. 돈은 땄는데 그들은 그냥 호구가 아닌 깡패 무리였고 결국 에디는 흠씬 두들겨 맞는다. 기억하기로 아마 양손의 엄지손가락이 부러졌을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유일한 날개가 부러진 채로 에디는 다시 사라의 집에 돌아왔고, 울면서 그를 끌어안는 사라와 그녀 품에 얼굴을 묻는 에디는 <해피투게더>의 그 장면과 꽤 비슷하다. 이후 과정도 비슷한데 ‘그들은 행복해진다.’ 특히 사라는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고 동네이웃들과 반갑게 인사하며 집으로 돌아와서는 에디를 보살펴준다. 둘이서 공원에 소풍을 나갔던 것 같다. 거기서 에디는 자신을 ‘루저’라고 평했던 버트의 말을 떠올리고 사라에게 그 얘기를 들려준다. 그리고 또 한참 당구에 대한 자신의 열정과 소박한 긍지를 털어놨던 것 같다. 묵묵히 들어주던 사라는 에디에게 ‘당신은 루저가 아니라고 뭔가에 대해 그렇게 신이 나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것만으로 위너’라고 말해준다. 그리고 사라는 에디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에디는 말을 돌린다. 말을 돌릴 수 없게 되자 자신도 같은 말을 해주기를 원하느냐고 사라에게 묻는다. 사라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런데 만약 그 말을 내게 한다면 절대 물릴 수 없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에디는 나는 사랑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겠다고 했던 것 같다. 사라는 나는 알고 있다고 자신 없어 하는 에디를 쳐다보면서 확신에 찬 눈빛으로 답했다.
앞에서 내 나름 보영을 이해한답시고 그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진단으로서 ‘자신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말 그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인 표현일 거라 여기지만 그래도 왠지 더 구체적으로 덧붙여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무슨 처방을 내려줄 수 있는 입장도 주제도 아닐 텐데…… 내가 아는 한,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이 거울을 마주보며 ‘세상에서 제일 예쁜 건 누구?’ ‘응 바로 나’ 이렇게 자문자답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뭐 도움이 되겠지만 그것만으로 해결된다면 대체 뭐가 문제겠는가? 결국 혼자서는 누구도 해결할 수 없고 여기서 몇 마디로 해결할 것도 아니다. 주고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결국에는 말이다. 누군가로부터 충분히 받아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여의치 않았다면... 내가 노력하는 수밖에는 없다. 고로 되짚어 보면 아휘도 보영과 크게 다르지는 않은 ‘작고 초라한 새’였을 것이다. 그 역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가족을 등지고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온 것이다. 그리고 보영과 헤어지고 나서는 고독에 몸을 떨며 자신이 보영과 그닥 다르지 않았음을 이해하게 된다. 보영은 그처럼 그걸 이해할 수 있을까? 그가 날개가 부러져서 돌아왔을 때 아휘가 어떤 마음으로 그를 받아들였는지를... 에디는 사라를 이해할 수 있을까? 그녀가 왜 자신을 사랑한다고 확신에 차서 말할 수 있었는지를... 바로 며칠 전만 해도 그녀는 술에 취해 자신이나 그나 다 같이 경멸했었는데 말이다. 그녀는 그보다 강한 사람이라서 사랑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약하고 어쩜 그보다 약할 수 있겠지만 그날, 양손의 엄지손가락이 부러져 돌아온 그를 끌어안으며 지금껏 그녀가 외면했던 자신의 작고 초라한 모습까지도 함께 끌어안았던 것이다. 그걸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면 그럼 적어도 나 혼자만이 발 없는 새와 같다는 그 고립과 고독을 조금이나마 뚫고 나올 수 있을 텐데. 이 세계의 모든 발 없는 새들은 ‘거대한 시간’에 비하자면 뒤쳐져서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작고 초라한 새들이다. 그와 같은 까닭으로… 무려 이십여 년이 지난 영화 한 편에도 계절이 회귀하듯 사람들은 돌아오고 다시 또 돌아오는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