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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와분노 Feb 06. 2021

<북촌방향>의 흑백겨울

홍상수,유준상,김상중,송선미,김보경,2011 


 일상의 모험퀘스트와 보상

 한때는 “그냥 술 마시고 여자 꼬시는 영화잖아.”

 라고 간간히 일컬어지기도 했던 그의 영화들인데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게 보일법한 영화들이 꽤 있었으니.

 한편으로 또 따지고 보면 

 밤새 사람들끼리 타인과 자신의 취한 꼴을 구경하다 서로 어깨를 부딪으며 비척비척 도로가로 돌아가 택시타고 귀가하는 게 사람들의 참 일관적인 ‘일상의 모험’이라서… 그러니 그의 영화도 나름 어드벤처가 있는 셈이다. 그게 뭔 어드벤처냐고 또 따지기 앞서, 사람들이 실은 그 일관적으로 반복되는 모험에 모험 같은 설렘을 품기도 한다. 아무도 요청한 적 없는 퀘스트를 수행하듯 밤새워 술을 마시고 아무런 보상이 없을 줄 알았음에도 택시 안에서는 허탈해하고 변기 앞에서는 후회한다. 혹 무리에 이성이 끼어있었다면 그 희미한 가능성에 퀘스트의 보상을 꿈꿔봤겠지. 꿈이 이뤄지든 말든. 문제는 이뤄져도 별 것 없고 결국 별 것 없는 이 퀘스트를 또 자꾸 반복하며 또 무슨 보상을 바라게 될 거라는 것… 그래서 그 기묘한 삶의 패턴마저도 곱씹어보려 함이 그저 그런 그의 영화들이다. 


 자의식의 간극불완전한 연기와 불완전한 진정성

 대구에서 서울로 북촌으로… 일상의 모험을 기대하며(기대하길 부정하며) 영화 안에 들어선 주인공은 유준상이 연기하는 ‘성준’이다. 유준상의 원래 연기가 약간 과장된 느낌이 있는데 그 느낌 그대로 영화 속 성준도 자기 생활을 약간 과장되게 연기한다. 그래서 오히려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 왜냐면 영화 이전에 사람들은 누구나 어느정도 연기하니까. 그 연기가 전문배우만큼 전문적이지 못해 오히려 속내가 드러나보이기도 하고 가식적으로 비춰질 때도 있지만 실은 그 어설픔이 자연스러움이다. 때로는 그게 귀여워지기조차 하니… 결국 그 귀여움을 영화는 원한다. 영화의 자의식은 단정함과 엄정함을 유지한다. 그 단정. 엄정한 시선으로 관찰되는 인물의 자의식은 덜 엄격하고 더 나이브한 편인데 영화 속에서 계속 사람들과 마주치며 사람과 술에 취하다 보니 더 그렇게 풀어지고… 그러다가도 문득 혼자가 되어 자기 삶을 의식하려 든다. 그런 일상적인 자의식의 간극을 영화는 포착하면서 또 그런 포착을 위해 영화는 약간 높은 수준에서 맑은 자의식으로 바라보려 한다. 여기서 인물과 영화의 자의식 간극 또한 영화적으로는 더욱 중요해진다. 그 간극이 너무 벌어져버리면 영화가 멍청한 인물을 내려다보며 다만 신랄해지거나 단지 희화화되고 영화를 보는 관객들도 그렇게 본다. 

 그러므로 인물/영화의 자의식 간극을 균형 잡으면서 관객들이 너무 신랄하게 대상화하지 않게끔 그 인물 또는 배우가 지닌 캐릭터의 귀여움으로 공감할 수 있도록 하고 또 관객들이 너무 희화화해 내려다보지 않게끔 영화 형식은 단정함과 엄정함을 잡아주려는 것이다. 그렇다고 관객들이 영화를 너무 우러러볼 필요 또한 없기에 영화는 소박하게 절제하려 하는데(우러러보는 대상은 꼭 숭배받기만 하는 게 아니라 순식간 그 숭배가 경멸로 돌변하기도 한다.) 이 모든 밸런스가 꼭 결과적으로 정밀하게 맞아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영화 뿐 아니라 그의 다른 영화들을 통해서도 그렇고 보는 사람들에 따라서도 그러하다. 

 어쨌거나 

 영화 속 성준도 나/나 자신의 자의식 간극을 균형 잡으려고 나름 애쓰는 인물이다. 하지만 일단 ‘일상의 모험’ 속으로 들어와 버렸기에 북촌을 배회하며 자의식의 간극이  극적으로 좁혀지고 벌어지는 일상적 불균형을 체험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장면, ‘소설’이란 술집에서 영호(김상중)와 보람(송선미)을 맞은편 앉혀두고 열심히 그 나름 명료한 자의식으로 성찰했던 걸 설명하는데… 우리 삶의 원인과 결과 사이에는 사실 무수한 인과가 있기에 특정하기 어렵지만 우리는 그 중 하나만 특정하여 거의 소설을 쓴다는 식으로 말이다. 옆에 앉은 중원(김의성)이 괄목상대해주고 또 보람은 눈빛을 반짝이며 똑똑하다고 칭찬해 준다. 아마… 그러고 나서 성준이 담배를 피우러 술집을 나왔을 것이다. 보람이 따라 나왔고 두 사람은 맞담배를 태우며 서로에 대한 호감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그 호감도 보람의 것이든, 성준의 것이든 그 순간에 취해(사람에 취해 술에 취해 그와 그녀 사이 담배연기와 겨울 밤공기에 취해…) 특정하기 어려운 인과를 특정해버린 소설 같았음을 나중에는 깨닫게 되었을지 모른다. 나중의 명료한 자의식이 과거 무뎌졌던 자의식을 돌아보며, 그 벌어진 간극으로 드러난 나의 어설픈 연기와 어설픈 진정성에 괴리감을 느껴 괴로워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리 나중으로 갈 것도 없이 영화에선 과거 연인 경진(김보경)의 메시지가 시도 때도 없이 날아와 과거의 어설픈 연애소설 일부를 여전히 반복한다는 괴리와 모순을 성준과 관객에게 자각토록 만든다.

 그럼 어떡하지?

 가장 간단한 방법은 또 술을 마시거나 또 다음날 다른 사람을 찾아 술을 마시거나 또 다른 그녀를 찾아 예전 그녀같이 담배를 나눠 피우거나 입 맞추는 것이다. 그래서 예전 그 소설 속의 어설픈 연기와 어설픈 진심을 되풀이하며 취하고 취하고 취하고 깨어나고 깨어나고 깨어나며 그렇게 점점 좁히기 위해서 점점 벌어져버린 자의식의 간극에 괴로워지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한 거고 사람들은 보통 알아서들 그 간극을 균형 잡으려 애쓴다. 그러니까 애초의 그도 ‘집으로 슝슝~’ 다짐했던 게 아니겠는가? 


 반복되는 시간/반복되는 모순

 영화의 시간은 성준의 북촌여정을 따라 사나흘? 남짓 순차적으로 이어진다고 볼 순 있을 텐데… 그 오늘과 내일 또는 에피소드와 다음 에피소드 간의 인과가 의도적으로 흐려져 있다. 그래서 정확히 다음 날인지 같은 날인지 모호해지고 선후적으로는 대충 맞아떨어지지만 그조차 현실적인 선후인지는 모호하다. 이걸 놀란영화 플롯 짜맞추듯 볼 필요는 없을 거고(뭐 그래도 괜찮겠지만…) 그냥 사나흘의 여정으로 봐도 괜찮다. 중요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이라는 술집을 들락거리는 이전과 이후가 소설의 소설마냥 패턴화 된다는 ‘기묘한 인상’이다. 그 인상은 아마 영화의 기묘한? 형식으로 많이 얘기되었을 것 같은데… 강조할 게 있다면 그 형식은 아마도 영화 이전 작가가 현실을 바라보는 형식, 그러니까 현실 자체가 物 자체로 인식될 수 없고(객관적으로 인식될 수 없고) 자의식의 서술에 의한 주관적 현실일 뿐이라는 나름의 리얼리스틱한 관점일거라는 것이다. 헌데 여기서도 나의 현실을 서술하는 나/ 그 서술을 돌아보는 나 사이, 자의식의 간극이 벌어지면서 모순이 발생하는데(당연한 인과인 줄 알았는데 선택된 인과였고 솔직한 나인 줄 알았는데 어설픈 연기였고 진정한 진심은 작위적인 창작에 불과했더라는...) 그런 모순마저 되풀이되며 현실인듯 허구인듯 기묘한 인상의 현실이 기묘한 소설처럼 보여진다. 그런 현실의 허구성, 작위성을 영화 안으로 들여와 압축하고 극화하다 보니 기묘한 형식미로서 두드러지게 되는 것이고 말이다.

 어쨌거나

 이렇게 반복되듯 흘러가는 시간으로 인해 영화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인물 간 관계는 성준과 경진(김보경) 그리고 성준과 예전(김보경)이다. 영화 초반 술과 사람에 취해 또 자신의 감상과 본능?에 취한 성준이 경진의 집으로 찾아가 보여주는 모습은 여태껏 자신의 모순을 합리화하기 위한 모순에 찬 자기서술, 어설픈 연기와 어설픈 진심 즉 어설픈 소설에 다름 아닌데 거기서 깨어나자마자 그 소설을 합리화해보려고 어설프게 도망쳐 나오고 그러다가 찾아 간 ‘소설’이란 술집에서 예전 그녀와 똑 닮은 예전이란 그녀를 만나 이번에는 눈처럼 깨끗한 입맞춤, 산뜻한 사랑에 도전하지만 역시 눈처럼 탁해진 그 사랑은(모순은) 예전 그대로의 경진과 똑 닮은 예전이다. 

 그럼 뭘 어쩌라는 걸까?

 가장 간단한 방법은 자꾸 오는 경진의 메시지에 답장이라도 한 번 해주든가, 그래서 과거의 모순에 직면하든가… 아니다. 그에게는 가정이 있었으니 집으로 슝슝~ 돌아와 모든 걸 없었던 척 행세한다든가… 정말 그렇게 미래지향적?으로 행세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 정도로 뻔뻔하지조차 못하다면 확~ 절간으로 기어들어가? 이 한겨울에? 거기라고 서로의 온기가 필요해서라도 스님끼리 모여 사는데 아무 모순이 없으려고…


 불순할 수밖에 없는 나와 당신/영화처럼 生生했던 흑백의 겨울   

 절간은 절간 나름의 모순과 번뇌 그래서 수행이 있을 것이며 

 속세는 속세 나름의 번뇌와 수행이 있다. 그 번뇌를 수습해야 할 수행으로 따지자면 속세 쪽의 업무량이 훨씬 과다할지도.   

 성준은 딱히 수행이랄 것도 없이 모순을 모순으로, 번뇌를 또 다른 번뇌로 수습하며 북촌일대를 계속 싸돌아다니는 것 같다. 언젠가는 집으로 돌아가겠으나 거기서도 이 북촌의 미로는 계속될지 모른다. 그의 팬임을 자처하는 낯선 여자(고현정)가 사진을 한 장 찍자고 한다. 성준은 사진 찍히길 내켜하지 않는데 결국 찍는다. 북촌의 미로 속에 갇힌 자신의 과거, 떨떠름한 얼굴을 먼 훗날 흑백사진으로나마 돌아본다면 그땐 무슨 기분일까? 낯부끄러울까? 후회스러울까? 혹은 괴로워져 사진을 치워버릴까?

 그게 정말 먼 훗날이라면 

 그냥 왠지 모르게 그리워질지도 모른다. 술이 그리워서 연애가 그리워서가 아니라 그저 그 시간이… 그 시간 그 추운 길바닥에서 웅숭그리며 모여 있던 사람들, 그들과 나누었던 새하얀 입김이… 그 차가운 겨울 공기마저도. 

 어설픈 가식으로나마 서로의 진심까지 뒤섞어 주고받았던, 순전했던 진심이 못 되어 좀 미안했던 그 사람들, 술에 취해 깔깔대고 고함을 내지르면서도 서로의 불완전한, 서로의 모순으로 교류할 수밖에 없었던 그 사람들….

 새하얀 눈길 위의 모순 덩어리 입맞춤도

 눈처럼 깨끗할 수 없는 

 불순할 수밖에 없는 나와 당신이었겠지만, 그 시간과 장소를 마주 숨 쉬었던 서로의 차가운 숨결조차 영화처럼 생생하게 떠오를지 모른다. 

 <북촌방향>은 흑백의 그 겨울이, 그 북촌동네가 유난히 아름답게 간직된 영화이다. 엄청 막 예쁘게 꾸미려고 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 시간과 장소를 함께했던 배우들을 쳐다보고 있으면 불완전한 그들을 연기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生에 대한 온전한 애착 같은 것이 고스란히 전해져온다. 영화가 영화처럼 너무나도 생생해서 문득 서글퍼질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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