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토마스 앤더슨, 1999
1. 지난 주말... 미션 임파서블 4, 5, 6 편을 차례대로 봤다.
2. 5편이 가장 좋았는데 이유는 잘 모르겠다. 각본은 점점 별로였지만 이상하게 영화들은 볼만했고 결국엔 톰 크루즈 덕분이었던 것 같다. 이단 헌트 대신 톰 크루즈라는 영웅을 지켜보는 기분이랄까? 이 배우는 배우라는 직업 이상으로 자신을 영화에 내던진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하는지, 그렇게해서 뭔가를 증명하려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또 생각이 이어져서 매그놀리아를 다시 봤다.
3. 매그놀리아에서 톰 크루즈가 연기하는 '프랭크 매키'라는 인물은 정말 재밌다. 볼 때마다 웃기고 넋을 놓고 쳐다보게 된다. 분량이 많지 않아서 아쉬운데 PTA의 처음 구상에서는 아예 없었던 캐릭터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어느날 PTA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고 받아보니 톰 크루즈였다. '부기나이트'를 본 톰 크루즈가 PTA의 차기작에 출연하고 싶다고 먼저 연락해온 것이다. 당시 PTA는 영화나라 대통령에게 호출받은 기분이었다고 한다. 톰 크루즈는 영국에서 '아이즈 와이드 샷'을 촬영하던 중이었고 점점 그게 길어졌기 때문에 그 동안 PTA는 (톰 크루즈를 위한) '프랭크 매키'를 상상했다.
4. 그래서 그런지... 프랭크 매키는 톰 크루즈가 연기한 역할들 중 유난히 그의 자기반영적인 느낌을 준다. 톰 크루즈 인상의 어떤 특징을 극단화시킨 모습인데... 물론 따지고 보면 PTA의 자기반영이 우선할 것이다. 그게 톰 크루즈라는 인격의 어느 부분과 겹칠 수 있고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뭔가와 겹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프랭크 매키라는 인물이 흥미롭거니와 그를 이해할 수 있다. (유명한 일화지만 PTA가 파이트클럽 보다가 뛰쳐나왔다는... 그의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셨고 암환자를 희화화 하는 듯한 장면에 화가 났다고 한다.)
5. 매그놀리아가 다소 어렵게 느껴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렇다면 영화의 처음과 끝 그리고 개구리 비 때문일 것이다. 김영하의 소설에서 '소설책의 맨 앞과 맨 뒤를 뜯어내고 읽는 소년'이 등장한다. 흔히 작가들은 맨 앞과 맨 뒤에서 수작을 부리기 때문이라나? 그런 엇비슷한 게 매그놀리아에 있다. 이 영화의 맨 앞과 맨 뒤 그리고 개구리 비 같은 기적?은 평범한 이야기를 보다 폭넓은 의미로 확장하는 장치다. 일단 그것들을 빼놓고 보면 영화는 서로 원인과 결과를 주고받는 다양한 인물군상이 펼쳐지고 거기서도 결국 가족의 인과관계가 중심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암에 걸려서 죽어가는 두 남자가 있다. 두 남자는 각자 아들과 딸에게 돌이킬 수 없은 죄를 지었다. 그 죄가 원인이 되어 프랭크나 클라우디아 같은 인물들의 삶이 결과되어졌다. 그리고 이제 뒤늦게나마 죽음을 앞두고 그들은 아들과 딸에게 속죄하고 싶어하는데, 아들과 딸은 각자의 상처와 용서에 직면해야만 한다. 그밖에도 여러 인물들이 나오지만 서로가 타인으로 외면하는 와중에도 서로가 닮은 상처를 끌어안았다. 영화의 다소 복잡하고 화려한 편집, 연출은 이들 인물들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맥락으로 나간다. 나중에는 그 흐름이 장황하게 고조되어 교회합창단, 스럽기도 하지만, 어쩜 이 영화가 원했던 게 바로 그런 감정의 과잉이었을 것이다. 상처를 무시하고 묵혀둔 이들에게는, 이제 와서라도 아파하고 눈물 흘릴 '카타르시스'가 필요할지 모른다. 그것으로나마 도움이 된다면, 이 영화가 감정을 끌어올려 딱히 프로파간다를 노린 것도 아니므로 나는 괜찮다고 본다.
6. 모든 부모들은 자식들의 원인일까? 모든 자식들은 부모들의 결과일까?
7. 아니라고 말할 순 없다. 그게 전부라고 말할 수도 없지만 말이다. 어차피 모든 사람과 사람이 서로에게 원인이고 결과이다. 그 중에서도 부모와 자식은 가장 강력한 인과로 얽혀있는데 또 노력한다면 나는 내 삶의 원인이고 결과일 수 있다. 충분히. 허나 그게 과거를 무작정 외면하고 덮어두는 방식일 순 없다고, 그렇다면 오히려 과거의 원인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는 결과일 거라고... 1999년에 개봉했던 이 영화는 힘을 주어 표현한 듯하다. 이전 세기와 다음 세기의 사이에서, 이전 세대와 다음 세대의 사이에서 말이다.
8. 사실 본전만 따진다면 건전하고 교훈적인 가족영화다. 감상적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그걸 작가의 특별한 시선과 방법론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영화 처음과 끝에 등장하는 '기막힌 일화들' 세 명의 사형수, 비행기 사고, 총기 사고는 우리가 겪는 우연이 그 이면에 필연성을 가짐을 암시한다. 그러니까 '자살 아닌 자살'로 목숨을 잃은 아들처럼, 모든 자식들의 삶은 부모로부터 비롯된 필연성을 지니고 더 나아가 타인과 타인끼리도 그런 필연적인 인과를 주고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더더욱 나아간다. 인간세상의 인과 뿐만이 아니라 자연에 있어서도 어느날 개구리 비가 쏟아졌다면 그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뭔가 필연적인, 섭리라고까지 할만한 뭔가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족영화의 본전은, 그 바깥 타인과 타인의 영역으로 확장되고, 또 그 바깥 거대한 세상에 대한 의미로까지 넓혀진다. 그런 관념적 승화가 완벽하게 완성되지는 않을지라도, 세기말의 시점에서 어떤 종교적인 감정으로까지 영화를 끌어올려버리는 것이다.
9. PTA의 필모에서도 그런 점진적인 확장이 있었다고 본다. '데어 윌 비 블러드' 같은 영화는 미국의 역사나 종교에 대한 큰 담론으로 많이 얘기되지만 우선 구체적으로, 대니얼 플레인뷰와 그의 양아들 H.W.의 중요한 관계가 있다. 그 중요한 관계에서 대니얼 플레인뷰는 사실상 아들을 팔아먹은 아버지고 결정적인 순간에 아들을 버렸다. 그 역시 자식에게 죄지은 아버지인 것이다. 그리고 그의 맞은편에 일라이라는 청년이 있는데 약간 과장을 보태자면 그는 (하느님)아버지를 팔아먹은 아들이다. 아버지를 믿은 아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버려져 십자가에 못박힌 채 고통스럽게 죽어갔는지,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영리하게 가짜 아버지의 거짓된 권세만을 이용한다. 그러므로 이런 일라이와 대니일 플레인뷰는 서로 너무나 흡사한 유전자를 공유한, 그야말로 쏙 빼닮은 아버지와 아들 같다. 마지막 볼링장에서의 폭력은, 아버지의 자기혐오가 자신이랑 똑닮은 아들에 대한 분노로 표출되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매그놀리아에서 부모와 자식이 어느정도 화해와 용서를 이뤘다면 '데어 윌 비 블러드'에서 부모와 자식은 철저한 파국이다.
10. 뜬금없는 상상이지만 톰 크루즈와 연기한 '프랭키'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또 나중에 '마스터'라는 영화가 가능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마스터의 프레디 퀠은 어디까지나 호아킨 피닉스의 것이지만 말이다. PTA 영화 속 인물들은 서로 공명하면서 천천히 탐색의 영역을 넓혀왔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