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와인 역사상 최악의 대재앙으로 기록되는 ‘필록세라(Phylloxera)’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필록세라는 당시 유럽 인구의 1/3을 전멸시켰던 페스트(흑사병)만큼이나 유럽 전역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사건입니다. 특히 프랑스 와인 산업을 거의 빈사 상태에 빠뜨렸죠.
하지만 그런 재앙 속에서도 사업가적 기질을 발휘해 꿈의 발판을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와이너리 중 하나인 보리우 빈야드(Beaulieu Vineyard)를 설립한 조르주 드 라투르(Georges de La Tour)입니다. 그가 어떻게 기회를 포착했는지 한 번 알아볼까요?
'파괴자'로 불리는 해충, 유럽을 초토화하다
'필록세라'는 일종의 진딧물입니다. 포도나무의 뿌리를 갉아먹고 감염시켜 결국 나무를 말라죽게 만드는 해충이지요. 한 번에 수 백개의 알을 낳아 바퀴벌레처럼 빠르게 번식합니다. 이렇게 말하니 별 거 아닌 것처럼 들리는데, 이 진딧물은 작은 크기와는 달리 상상을 초월하는 파괴력을 갖고 있었어요. 오죽하면 학자들이 이 진딧물의 이름을 '파괴자(Vastatrix)'라고 지었을까요.
프랑스는 필록세라로 인해 약 250만 헥타르(약 70억 평) 이상의 포도밭이 파괴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프랑스 포도밭 전체 면적의 70% 였어요. 이뿐만이 아닙니다. 프랑스를 시작으로 필록세라는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결국 유럽 전체 포도밭의 60%를 초토화시키고 맙니다.포도밭이 손 쓸 수 없을 만큼 황폐화되자, 수백만 명의 포도 재배자와 와인 산업 종사자들의 생계가 무너졌습니다.
필록세라는 이처럼 와인 산업에 끔찍한 상처를 남겼어요. 이 작은 해충은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걸까요?
검역이 없던 시대, 바다 건너온 위험한 식물
19세기 중반은 산업 혁명과 함께 과학과 기술이 급격하게 발전하던 시기였습니다. 과학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식물학, 농업 등의 분야도 주목을 받게 되었어요.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농업과 식물학을 연구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유럽과 미국, 그리고 다른 대륙 간의 식물 교류도 활발해졌습니다.
다양한 식물들이 배를 타고 유럽과 미국을 넘나들었는데, 그중에는 포도나무의 묘목도 있었어요. 이 과정에서 함께 옮겨진 해충이 바로 ‘필록세라’입니다.
당시에는 '검역'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외래 병해충이 들어왔을 때 국가적인 재앙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필록세라는 사실 '자연적인 재해' 보다는 '인위적인 재해'에 가깝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직접 이 작은 해충을 가져왔으니까요.
과학자들, 죽음의 비밀을 풀다
필록세라는 1863년 프랑스 남부 론 지역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포도밭에서 포도나무들이 급격히 말라죽기 시작했고, 이런 증상이 프랑스 전역으로 확산되자 프랑스 정부는 당시 농업 연구의 중심지였던 '몽펠리에 연구소'의 과학자들로 위원회를 꾸려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과학자들은 피해를 입은 포도나무의 뿌리를 캐내 오랫동안 분석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뿌리 주변에서 미세한 노란색 곤충들이 떼를 지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곤충들은 매우 작아서 현미경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 작은 곤충들이 포도나무뿌리에 붙어 영양분을 빨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이 것이 바로 나중에 '필록세라'로 불리게 되는 해충이었어요.
유레카!
이제 원인을 찾았으니 해결 방법만 찾으면 된다며 과학자들은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이게 웬걸요. 돌아온 것은 조롱과 비난뿐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작 진딧물이 이렇게 대규모의 포도밭을 파괴시켰다는 걸 믿지 못했습니다. 특히 곤충학자들은 몽펠리에 연구소의 과학자들이 곤충 전문가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들의 주장이 말도 안 된다며 비난했어요.
필록세라가 문제의 원인으로 인정받는 데까지 무려 7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선택의 기로, 자존심인가 밥줄인가
1870년, 프랑스 정부는 필록세라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찾기 위해 2만 프랑의 포상금을 내걸었습니다. 하지만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면서 포상금은 30만 프랑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워낙 엄청난 금액이다 보니 별별 기상천외한 방법들이 다 나왔어요. 포도밭을 침수시켜 해충을 익사시키자는 의견, 땅을 파서 불을 지피고 그 열로 퇴치하자는 의견, 독극물을 사용하자는 의견도 있었고, 두꺼비를 땅에 묻으면 해결될 거라는 주술적 믿음을 가진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몽펠리에 연구소의 과학자들은 필록세라가 미국에서 유입된 해충이라는 사실을 알아냈어요. 미국의 포도나무가 이 해충에 저항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죠. (실제로 미국에서는 필록세라로 인한 큰 피해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저항성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유럽 포도나무에 미국 포도나무뿌리(*루트스톡)를 접목하는 방법을 생각해 냈어요.
하지만 프랑스의 포도 재배자들은 이 접목 방법을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어요.
첫 번째, 맛 변질에 대한 우려
프랑스 포도 재배자들은 미국 포도나무뿌리를 접목하면, 프랑스 와인 특유의 맛과 품질이 손상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미국 와인 맛이 나면 어떡하냐고 걱정했지요.
두 번째, 원흉에 대한 반발심
필록세라가 미국에서 건너온 해충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미국에 대한 편견과 반발심이 거세졌어요.
그래서 그들은 버티고 또 버텼지만,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필록세라를 해결할 다른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 점점 명확해졌어요. 그리고 결국 이 방법을 받아들이게 되었죠.
일타쌍피! 돈도 벌고 명예도 얻고
조르주 드 라투르는 프랑스 출신이지만, 1883년에 와인 사업을 하기 위해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당시 미국, 특히 캘리포니아는 와인 산업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고, 라투르는 이 지역에서 자신의 와인 사업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문제는 초기 자금이 부족하다는 거였어요. 다방면으로 기회를 모색하던 라투르는 필록세라가 프랑스 포도밭을 황폐화시키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미국 포도나무뿌리(*루트스톡)가 이 해충에 저항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지요.
그때, 그의 사업가적 기질이 번뜩였습니다. 그는 프랑스의 포도 재배자들에게 미국 포도나무뿌리를 직접 공급하기로 했어요. 미국 포도나무뿌리를 대량으로 확보하고, 이 것을 프랑스에 수출하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이 사업으로 라투르는 상당한 부를 쌓게 되었어요. 이때 쌓은 부를 바탕으로 그는 그토록 원하던 와이너리를 설립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설립한 보리우 빈야드(Beaulieu Vineyard)는 나파밸리에서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와이너리 중 하나로 자리 잡게 됩니다.
조르주 드 라투르가 포도나무뿌리를 수출한 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성공에 그치지 않고, 프랑스 와인 산업을 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세계 와인 업계에서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