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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연 Nov 10. 2016

자아를 찾는 여행

촛불집회에 대한 단상

"왜 나왔냐고요? 국민이 호구 됐잖아요, 호구! 깔깔깔!” 11월의 첫째 주 토요일 오후 네시 광화문 교보빌딩 앞. 인턴기자인 나는 촛불 집회를 취재하러 이곳에 왔다. 어디에 앉을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다섯 명의 교복 입은 소녀들이 눈에 들어왔다. 14년 전, 바로 이 장소에서 붉은 악마들이 함성을 내지를 때 태어난 중학생들이었다. 자리 잡는 법을 알려주는 척하면서 말을 걸었다. “어른들은 TV 보고 욕만 하는 게 다던데요. ‘안타깝지만 나도 일상이 있다’고 핑계 대면서 집회를 안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안 바뀐 거 아닐까요? 우리 같은 애들도 나왔으니까 이제 바뀔 때가 된 거죠.” 저 얼마나 자신감에 찬, 낙관적인 말인가. 나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왜요, 아니에요?” 들켜버린 나의 웃음에 아이들은 다시 물어왔다. 달리 웃음을 해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황급히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씁쓸한 뒷맛이 남았다.

그 전 토요일에도 집회에 나왔다. 집회에 처음 왔다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무대 앞에서 연사가 하는 말을 듣기보다는, 하하 호호 각자의 동행과 떠들기 바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때때로 울려 퍼지는 데 따라 부르는 이는 그다지 없었다. 대신 혼자 와 청계천 난간에 기대 있는 ‘혼참러’, 통제돼 텅 빈 차도를 마음껏 뛰어다니는 어린이, ‘박근혜는 하야하라’ 피켓을 들고 인증 셀피를 찍는 연인 등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청계천에 존재했다. 그들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다. 동시에 어딘가 그 모습이 불편했다. ‘처음엔 스트레스도 풀고 재밌겠지’라는 냉소가 절로 흘러나왔다. 후에 나온 이경재 변호사의 발언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스스로 부정하고 싶을 정도로 꼰대 같은 감정이었다. 취재를 나왔으니까, 애써 거리를 두려는 본능에서 나온 마음이겠지, 라며 서둘러 감정을 봉합해버렸다. 그리고 일주일 만에 다시 온 촛불집회. 중학생들과의 만남을 통해 드디어 내 감정의 연원을 찾을 수 있었다. 그 거리 두기는 패배에 익숙한 사람의 방어본능이었다. 혹은 한 번도 자신이 질 것으로 생각한 적 없는 아이들의 해맑은 낙관 앞에서 순간 발현된 부러움이었다.

내 세대는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이후로 ‘촛불 소녀’라고 이름 붙여지며 자라왔다. 그만큼 촛불집회는 익숙했고, 무언갈 바꿀 수 있다는 상징이었다. 불같은 연사들의 목소리나, “우리는 한꺼번에 되찾으리라”고 외치는 단결 투쟁가는 금방이라도 세상을 뒤집을 것만 같았다. 우리 때는 모든 걸 뒤엎었어, 라는 민주화 세대의 자랑은 내가 그려온 미래였다. 그런 믿음으로 광우병, 반값등록금, 한미FTA 저지, 세월호 특별법 집회를 나갔다. 하지만 이제 세상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바꿀 수 있다고 믿는 한탕주의가 더는 먹히지 않았다. 승리의 경험보다는 패배의 경험이 쌓여갔다. 나는 언제부턴가 촛불집회를 나가지 않게 됐다. 나를 패배주의에 찌들게 만든 건 세상이라는 애늙은이의 레퍼토리를 술자리에서 반복할 뿐이었다. 젊은 세대는 ‘작은 승리’의 경험이 없어서 그렇다는 몇몇 기성세대의 위로는 든든한 변명이었다. ‘작은 승리’를 이뤘다는 이화여대생의 자부심은 동경이면서도 질투의 대상이었다.

촛불집회에 나온 장삼이사를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어쩌면 스스로가 촛불집회를 과도하게 승리와 패배의 이분법 속에 가두려 한 것은 아닐까. “나도 뭔가 바뀔 거라는 생각은 안 해. 그래도 왜 나왔냐고? 1987년도에도 그랬어. 마르크스주의고 뭐고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답답하고 화나고, 이유는 알 길이 없으니까 거리에 나온 거지. 그러다 바뀐 거야.” 1987년 이후로 첫 집회라는 50대 아저씨가 내게 말했다. 맞다. 이제 집회를 통해 무언가 바꿀 수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집회를 통해 세상이 단숨에 뒤집어질 것처럼 호들갑 떠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저 수많은 정치적 열정은 ‘패배’나 ‘승리’라는 단어에 갇혀 곧바로 쪼그라들 가능성이 높다. 대신, 그것을 참을 수 없는 수많은 ‘나’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 자체가 소중하지 않을까. ‘호구 된 기분’을 어렴풋이 느꼈다는 것, 거국중립내각이나 탄핵 중 뭐가 더 좋은지는 몰라도 좋으니, 그저 딱히 다른 방법이 없어서 그곳에 나왔다는 감각이 중요하지 않을까. 이 정치적 열정을 굳이 집회의 요구가 관철되는 것을 기준으로 시민들이 ‘이겼다’ 혹은 ‘졌다’라고 결론 내릴 수 있는 것일까.

“이제 우리가 단군 이래 최대의 혁명을 해야 할 때입니다!” 집회의 열기가 무르익던 때, 도올 김용옥이 단상에 나서서 외쳤다. 달변가답게 화려한 수사였지만 어쩐지 공감되지 않았다. 뒤쪽의 시민발언대로 발길을 돌렸다. “저는 우리 아이들에게 바르고 정직하게 살라고 가르쳤던 저 스스로가 부끄러워서 이곳에 나왔습니다.” “노력하는 만큼 돌아온다는 생각으로 정직하게 살아온 제 삶이 부정되는 느낌이었습니다.” 끊이지 않는 각계각층 시민들의 발언에는 ‘나’가 있었다. 화나거나 침통하거나 부끄럽거나 억울한 ‘나’. 대의 속에서 묻히기 일쑤였던 ‘나’의 이야기. 거대한 구호 대신 이번 사건으로 각자가 겪은 생각의 변화들이 스피커를 통해 술술 흘러나왔다. 맑은 얼굴의 중학생들에게 지었던 조소가 문득 떠올랐다. 다시 만날 기회가 있다면 하지 못했던 대답을 하고 싶다. 이번 한 번으로 어떤 것도 변하지 않더라도, 함께 낙담하지 말자고. 오히려 승리와 패배를 손쉽게 속단하는 세상에 맞서, 자아를 찾는 계기로 삼자고. 우리 모두 국가와 사회는 무엇이고 그 안에서 나는 무엇인가를 찾는 거대한 여행을 시작했다고. 그리하여 이들 앞에서 아무도 감히 승리니 패배니 하는 말을 내뱉지 않기를, 수많은 촛불 앞에서 나는 바라고 또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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