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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연 Feb 01. 2017

가성비의 나라

JTBC 드라마 <청춘시대> 의 윤진명(한예리)은 가난한 대학생이다. 진명에게 사치가 있다면 일주일에 한 번 네캔에 만 원짜리 편의점 맥주를 사는 것이다. 진명의 사치는 나의 사치기도 하다. 각 맥주의 가격과 상관없이 취향 따라 수입맥주를 고를 수 있다는 사실은 편의점에서 누리는 단연 최고의 행복이다. 


그 행복을 의심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처음 보는 수입 맥주가 편의점에 들어왔다. 당연히 ‘네 캔 만 원’에 포함되겠거니 계산대로 갖고 갔는데 해당하지 않는단다. 맛이 너무 궁금했지만 ‘네 캔 만 원’에 포함되지 않는 맥주를 먹는 것은 모험이었다. ‘맛없으면 어떡하지?’ 결국 원래 먹어온 그럭저럭의 맥주를 샀다. 그리고 알게 됐다. 내 행복은 맥주의 맛보다는 ‘가성비’ 좋았다는 만족감에서 비롯됐음을. 


가성비는 언제부턴가 소비의 금과옥조가 됐다. 전자제품에나 쓰이던 단어가 어디에나 찰떡같이 달라붙는다. 3500원짜리 혜자도시락을 먹고 한잔에 1500원 하는 커피나 주스를 먹으면 그날은 ‘가성비 갑’이다. TV프로그램도 가성비를 따진다. tvN <편의점을 털어라>는 이른바 편의점 음식 꿀조합을 알려준다. 식빵 안에 레토르트 스파게티를 넣으면 빠네가 되니 레스토랑을 갈 필요가 없다는 식이다. 추위에도 가성비는 통한다. 난방비를 절약해주는 따수미 난방텐트만 있으면 된다.


어떤 사람은 절약한다는데 나쁠 게 뭐가 있나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성비 타령이 불편하고 서글픈 이유는 따로 있다. 가성비는 선택을, 모험을, 취향을 차단한다. 가진 게 없는 입장에서는 안전한 맛과 안전한 느낌만이 제일 나은 선택이다. 과자 하나를 사는데도 후기를 찾아본다. 물건을 사기 전엔 가격순으로 정렬해 배송비를 포함해 무엇이 더 싼지 재보느라 시간을 보낸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가 목적이 아니라, 저렴한 가격에 그럭저럭한 효용만 얻으면 그만이다.


어쩔 수 없다. 취향 찾겠다고 막 소비했다간 혹독한 실패의 비용을 치러야 하기 때문이다.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산 화장품이 피부에 맞지 않아도, 우선은 써야 할 때의 마음을 아는가. 당장 수중에 만원뿐인 사람에게 재미없는 영화는 시간 아까웠다고 치부될 것이 아니다. 그나마 있었던 문화생활의 기회를 기분 나쁘게 날려버리는 완벽한 실패다. 몇 년 새 한국영화 메가히트작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가성비 사회에도 물론 취향은 있다. 대신 아주 작은 범위 내에서만 허락된다. 드럭스토어나 다이소에서 천 원짜리 양말 열 켤레, 이천 원짜리 매니큐어를 색깔별로 사는 ‘탕진잼’이 그것이다. 


이런 삐딱한 생각을 하다가도, 요즘에는 가성비를 놓친 절망이 소비에서뿐이라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사회 전반이 가성비에 잠식당하고 있다. 대학 가봤자 실업자 되게 십상이니 고등학교 때부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것은 가성비가 좋다. 창업은 실패하면 남는 건 아무 데서도 알아주지 않을 경험뿐이니 가성비가 좋지 않다. 꿈, 사랑, 열정, 도전, 행복… 이런 추상적 단어일수록 가성비는 최악이다.


요즘의 나는 모든 경험과 도전이 가성비로 환산돼 눈앞에 나타나는 삶을 살아왔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자기소개서에 써먹지 못할 경험이라면, 하고 싶어도 꾹 참는 게 내 대학생활이었다. 예전에 한 면접장에서는 이런 경우도 봤다. 그 사람은 자기소개서에 여행을 좋아해 많이 다녀왔다는 얘기를 썼는데, 여행에 대한 글이나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놓지 않았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런건 만들지 않았다는 대답에 면접관은 그러면 뭐하러 여행을 갔냐고 면박을 주었다. 면접장의 분위기 탓에 가성비 좋지 못한 선택을 한 그가 잠깐 어리석어 보일 정도였다. 그는 면접에서 떨어졌다. 


실패의 비용이 두려워 나를 위한 선택을 하지 못하는 가성비의 나라. 12000원짜리 빠네를 사 먹는 대신 14000원어치의 재료를 사고 4000원어치의 효용을 얻는 가성비의 나라. 남들에게 보여줄만 한 글이나 영상으로 남겨놓지 않으면 쓸데없는 여행이 돼버리는 가성비의 나라. 네 캔에 만원인 맥주들 앞에서 무언가를 고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가성비의 나라. 그런 나라에서 나는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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