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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연 Jul 20. 2016

7월 20일의 상념.

떼어내도 떼어내도 눈에 띄어 버리는 어떤 옷의 실밥처럼 내내 나를 따라다니는 말이 있다. 대개는 '나'에 대해 누군가가 해준 이야기다. 너무 상찬인 것은 기분이 좋았다 금방 잊혀지고, 너무 상처인 것 역시 기분이 나빴다 금세 망각되고, 역시나 오래 남는 것은 파악하지 못했던 나의 성격, 그러나 정수를 찌르는 말이다.


곧 부서를 옮기는 선배는 늘 나에게 쫄지 말라는 이야기를 한다. 정작 나보다 강하거나 높은 사람에게는 우물쭈물하는 본성을 드러내는지라, 선배에게는 그게 눈에 다 보였나보다. 그는 나에게 떠나면서 피드백을 주었는데 '너는 조금만 아니다 싶으면 뒤로 드러누워버리는 성향이 있어'라고 말했다. 처음엔 발끈했다. 아니, 내가 온갖 발제를 갖고 가도 어차피 답정너(로 기사 '킬'!)인데, 도대체 나한테서 바라는게 뭐지, 나로서는 최선의 태도였다고, 와 같은 발끈. 하지만 혹여 그것이 상황적인 것을 고려하지 못한 상급자의 성에 차지 않음이라 할지라도, 그 말은 어느 정도 맞다. 나는 여태까지 꽤나 내가 해올 수 있는 것만 해왔으며, 조금만 아니다 싶으면 드러누워버리고 될대로 되라 놔두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성격이 나쁘다곤 할 수 없다. 적당히 자기 선을 지키면서 할 수 있는 것만 하는 것은 미덕도 아니지만 악덕도 아니다. 다만 내가 발딛고자 하는 세계에서 그것은 꽤나 큰 단점이며, 그렇기에 내가 외면하고 싶었던 모습일지도. 나는 내 마음 속에 소심함이 있음을 그렇게 숨기려고 했는데 결국 들키는구나. 모르겠다, 그냥 '하고싶다'는 맹목적 마음은 이제 유아 같다며 버린줄 알았는데. 계속 그래왔나보다. 3년 전 학교 밖에서 울고불고 힘들었던 나로 다시 돌아간 느낌이다. 생각해보니, 나 그렇게 간신히 임기를 마치고 학보사를 도망쳐 나온지 10개월 째인가, 11개월 째인가부터, 다시 기자하고 싶었던 거, 어떤 여자애 때문이였다. 나보다 나을거 하나도 없어보이는 애가 기자 준비한다고 온갖 유난을 부리고 잰채하는게 너무 싫었다. 난 걔를 이기고 싶었다. 그 때, 사실상 드러누워버리는 내가, 누구보다 뭘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건 정말이지 기회라고 생각이 들었다. 근데 이제 모르겠다. 아무도 이기고 싶지 않고, 누구보다도 잘하고 싶지 않다. 무엇보다 즐겁지가 않다.


오늘 취재를 갔다온 스타트업 직원 분들, 다 이름만 들어보면 알만한 대기업을 다니다가(혹은 의사 레지던트를 하다가) 재밌는거 하고 싶다고 때려치고 나오신 분들이다. 근데 그것도, 다 즐겁지 않았던 대기업에서의 삶이 있어야 그럴싸해보이는거 아닌가, 라는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아, '그럴싸'. 돌이켜보면 인정하기 싫지만 나는 그럴싸에 집착하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난 '나 이런거 할 줄 알아'라는 명예욕, 타이틀에 취해서 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즐겁지 않은 이 느낌을 버릴 수 없나보다. 모르겠다. 얼마 전에 미국 대딩들이 개강 전에 미친듯이 노는 영화를 하나 봤다. 영화는 링클레이터 감독의 '에브리바디 원츠 썸!'. 걔네 진짜 엉망진창으로 놀고 섹스하고 난리나고 별 내용 없는 영화인데, 마지막 씬이 자꾸 기억에 남는다. 첫 개강 날, 꼰대 같아보이는 교수는 칠판에 '한계를 정하는 건 나 자신이다'라고 쓴다. 그리고 엎드려서 잠을 청하는 주인공. 이 문구 역시 실밥처럼 자꾸 나를 따라다닌다. 나는 이래나 저래나 한계를 정해놓고 있다. 즐거운 것도, 성취하고 싶은 것도. 인간은 한계가 있지만, 나는 지레짐작으로 한계를 늘 걱정해버린다. 아무리 생각해보다 선배의 저 말은 잘 간파한 말이다. 자, 떠들라면 미친듯이 더 떠들 수 있는데 이제 다시 회사로 복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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