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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연 Jul 21. 2016

'안보'의 인플레이션화

국가안보, 인간안보, 사드, 성주에 대한 단상

화폐와 언어는 비슷하다. 둘 다 한 사회의 구성원이 임의로 만들어낸 약속이며, 남이 사용하던 것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가장 비슷한 점은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점점 그 가치가 떨어진다는 속성이다. 통화 발행이 늘면서 화폐 가치가 떨어지는 경제학에서의 ‘인플레이션’처럼 언어에도 인플레이션이 있다. 언젠가 시장 기름가게 앞에 붙여진 ‘100퍼센트 진짜 순 참기름을 팝니다’라는 문구를 보고 서글퍼진 적이 있다. 순(純)과 진짜라는 형용사를 덧붙였다. 그것만으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100퍼센트까지 운운하는 꼴이라니. 몇 번이고 힘주어 말해야 겨우 뜻이 통할 정도로 저 단어들은 효용가치가 떨어진 셈이다. 


한국은 안보라는 말 앞에서 일순간 모든 정치적 가치가 쪼그라드는 나라다. 민주주의, 평화, 인권은 안보 앞에서 속 편한 단어가 된다. 대신 쓰일 곳 안 쓰일 곳 가리지 않고 안보 논리는 적용됐다. 너무 남용된 탓에 오히려 우스워졌다. ‘안보’라는 개념에도 인플레이션이 생겨버렸다. 사람들은 무뎌졌다. 젊은 사람일수록 그렇다. 북한이 탄도미사일을 쐈다는 소식에도 네티즌들은 “입금 완료됐냐”며 비웃는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사진은 소위 유머스러운 ‘짤방’으로 대체된다. 북한의 소식은 이제 위협이 아닌 유희다. 이제 사람들에게 진짜 무서운 것은 북한과 같은 외부의 적이 아닌 국가 내부의 위험이다. 세월호, 메르스, 옥시 사태를 거친 학습 결과다. 


이는 정부가 여전히 국가의 군사력 중심으로 안보를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때 국가는 유일한 안보 행위자가 된다. 막스 베버 말마따나 국가란 "정당한 물리적 강제력의 독점을 관철시킨 유일한 인간 공동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가안보’는 국제적으로는 이미 낡아도 한참 낡은 개념이다. 이미 1982년의 UN 팔머위원회 보고서는 이렇게 말했다. “본 위원회는 국가들이 서로의 희생을 토대로 안보를 성취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군사력만으로 안보를 성취할 수 없다고 믿는다.” 대신, 국가가 막강한 군대를 유지하면서도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이것이 위협의 원천이 되는 사례는 흔하다. 안보딜레마 상황이 속출한다. 세계 최고의 국방력을 자랑하는 미국도 9/11 테러를 예방하지 못했다. 이후 대테러조치 역시 전통적 시민권을 위협하는 방향으로 흘러갔고 이는 도리어 개개인의 안보를 위협했다. ‘안보를 위해서’라는 손쉬운 구호는 효용가치를 잃어갔다. 


안보의 인플레이션 속에서 정작 중요하게 취급돼야 할 ‘인간안보’는 방치되고 있다. 인간안보는 주권국가를 중심으로 하던 기존의 안보 대상을 인간 개개인으로 돌리자는 시각에서 탄생한 개념이다. 이 과정에서 안보의 범위는 전쟁뿐만 아니라 환경파괴, 질병, 재해, 경제난, 성폭력, 아동 학대 등으로 넓어진다. 인간안보에 대한 고려가 있었다면 ‘사드’와 관련된 성주 주민의 극렬한 반발은 없었을 것이다. 인간안보는 모든 사회 구성원의 동참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국가만이 안보라는 ‘공공재’를 배급하는 유일한 주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성주 주민의 핵심 정서는 의사결정과정에서 전적으로 배제 됐다는 데서 오는 모욕감이다. 레이더 유해성이나 외부세력 여부에 대한 시시비비는 부차적 문제다. 사드 배치 논의가 진행되는 동안 주한미군은 수차례 성주의 부대를 방문했다. 그런데도 도나 군은 주민들에게 전혀 정보를 알리지 않고 소외시켰다. 긴급한 결정을 필요로 하는 외교∙국방 사안이라고 변명하기엔 사드 배치의 논의 기간은 길었다. 관료 엘리트들의 회의 속에서 당사자인 주민들의 목소리는 배제됐다. 


인간안보의 개념이 정부의 안보에 대한 사고와 정책에 적극적으로 스며들어야 한다. 사람들은 이제 국가안보보다 인간안보의 개념에 더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공감하고 있다. 물론 여전히 안보는 중요하다. 다만 공감대가 부족한 구시대적 국가안보만을 내세우며 안보라는 단어를 남발하다 보니 정작 필요한 안보에 구멍이 생기고 있다. 안보는 민주주의, 평화, 인권과 대비되는 개념이 아니다. 이들을 포용하며 갈 수 있으며 가야 한다. 인플레이션화(化)된 안보에 새로운 효용가치를 부여할 때다.


덧붙임) 사드와 안보와 성주에 관련해 읽어볼만 한 글.


1. [중앙시평] 성주, 그 보편성에 대하여

http://news.joins.com/article/20337582


마지막으로 성주의 문제는 우리가 당면한 도시와 지방의 보편적 문제이기도 하다. 인구의 절반이 수도권에 몰려 살고 있고, 영호남과 농어촌을 가리지 않고 젊음과 부와 희망과 유권자들이 수십 년 동안 바람처럼 빠져나간 장면에서 느닷없이 사드 배치를 통고받은 성주 주민들이 당면한 농담 같은 역설은, 자신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그 수도권조차 지키지 못하는 방어체계를 갖추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성주는, 아니 우리의 보편적인 고향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영문도 모른 채 고향 잃은 자들이 요구하는 살 한 파운드를 베어주고 허허롭게 돌아서야 할지 모른다. 그런 상처들을 우리 공동체가 한 번이라도 어루만지려 노력한 적이 있었던가.



2. [이남주의 정치시평]사드, 피할 수 없는 민주적 안보 논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7182059035&code=990100#csidxd52bb154f96bdc88da172d09d5bbd13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7182059035&code=990100



권위주의 시기부터 안보 관련 정책결정은 행정부가 사실상 독점해왔다. 전쟁을 경험하고 남북이 분단되어 있는 나라에서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내세운 결정에 이견을 제기하기는 어려웠다. 관련 정보가 제대로 공개되지 않은 탓에 시민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는 더 어려웠다. 민주화 이후에도 이 같은 상황은 계속돼 왔다.

그러나, 평택 대추리 미군기지 반대투쟁이나 제주 강정 해군기지 건설 반대투쟁 등이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었다. 이 활동들이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내세운 정책결정이 진정으로 안보에 도움이 되는지, 그렇다고 하더라도 시민의 삶의 안정을 해치면서까지 진행될 가치가 있는지 등의 질문을 공론장에 제기했다. 그 과정에서 안보 문제에 대한 국민적 차원의 학습도 진행됐다.

이제 우리 국민은 권위주의 정부가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 “국가안보를 위해서”라는 한 마디에 위축되지 않는다. 사드 배치 결정은 이런 학습과정을 한단계 높여주고 있다. 당장 성주군민들도 이제 레이더 전자파 문제부터 사드가 한반도에 필요한 무기인지에 대해 인터넷을 뒤져 스스로 학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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