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물이 난무하는 요지경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
나는 에매랄드 빛 바다를 좋아한다. 검푸른 바다는 뭐랄까, 무섭다. 어쩐지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편안하게 숨 쉬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래서 바다수영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스노클링만 한다. 그것도 구명조끼나 튜브가 없으면 들어가지 않는다. 한 번 맛보면 헤어 나올 수 없다는 스킨스쿠버나 프리다이빙의 매력은 나에게는 너무도 먼 이야기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취향을 갖고 있고, 나도 나름대로의 취향이 있다. 퇴근길에 바닐라 아이스크림 한 통을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내 취향에 대해 생각해봤다. 나는 어떤 취향을 가진 사람인가.
바닐라 아이스크림과 다른 무언가(예를 들면 죠리퐁, 오레오)를 함께 먹기
맥주 캔 따는 소리와 맥주 거품 올라오는 소리(캬)
향 좋은 아메리카노. 그리고 급격하게 당이 부족할 때는 별다방의 아이스 화이트 초코 모카 시럽 한 번 빼고 휘핑크림 없이
떡볶이. 프랜차이즈 떡볶이보다는 포장마차나 시장에서 팔 법한 비주얼의 떡볶이. 튀김 중에서는 고구마튀김, 순대보다는 내장
도서관에서 읽고 싶은 책을 잔뜩 골라 집에 돌아오는 길
일주일에 하루는 혼자 있는 시간
가사가 예쁘고 잔잔한 노래
적당한 아재 개그. 정색과 박장대소의 경계는 아직 구분하지 못했지만
TV 켜놓고 핸드폰/아이패드로 웹서핑
귀여운 캐릭터. 약간 맹하게 생겨서 멍청해 보이지만 귀여운
탁 트인 자연풍경
야경. 특히 알전구. 아주 작은 알전구보다는 중간 사이즈의 통통한 알전구
해질 무렵 풍경, 하늘을 도화지 삼아 펼쳐지는 노을이란
사진 찍기와 사진 찍히기. 특히 역광으로
이런 취향을 갖게 된 이유를 떠올려보면 글쎄, 딱히 계기가 생각나지 않는다. 이유가 없다. 그냥 좋다. 그냥이라는 두 글자가 이렇게 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을까. 재밌는 부분은 이런저런 취향을 가진 동일한 ‘나’는 누군가에게는 좋은 사람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답답한 사람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냉정한 사람이기도 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궁금한 사람이기도 하다는 거다. 어느 노래 속 가사처럼.
그래 난 누군가에겐 봄 누군가에게는 겨울
누군가에겐 끝 누군가에게는 처음
난 누군가에겐 행복 누군가에겐 넋
누군가에겐 자장가이자 때때로는 소음
- 이소라 ‘신청곡’
사람들의 다양성, 그리고 그 다양성을 대하는 사람들의 다양성을 ‘봄’, ‘겨울’, ‘끝’, ‘처음’, ‘행복’, ‘넋’, ‘자장가’, ‘소음’으로 풀어낸 작사가의 통찰에 그저 박수를.
검푸른 바다를 앞에 두고서야 알게 된다. 나는 에매랄드 빛 바다가 더 좋다는 걸.
히스테릭한 사람을 보면서 생각한다. 나는 아무래도 긍정적인 사람이 더 좋다는 걸.
마이크로 매니징을 보면서 느낀다. 아 나는 자율과 권한 위임이 더 맞다는 걸.
무언가는 좋고 무언가는 싫다는 이분법적 사고가 아니다. A보다는 B가 더 좋다는 상대적 개념이다. 비교대상이 없으면 내가 무얼 좋아하는지 알아차리지 못했을 수도 있다. 경험을 통해 만나는 기준점은 말 그대로 새로운 기준을 제시해준다. 그러니 모든 경험은 나를 향해 나아가는 한 걸음걸음인 셈이다. (이것은 이너 피쓰를 되찾기 위한 합리화인가 아닌가)
예전에 어느 책에서 인상 깊게 읽은 구절이 있다.
“어떤 야비한 일을 당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고민하지 말라. 단지 아는 것이 하나 더 늘었다고 생각하라. 즉, 인간성을 연구하는 데 필요한 새로운 자료라고 생각하라. 이상한 광물 표본 하나를 우연히 발견한 광물학자의 태도를 닮아야 한다. - 쇼펜하우어”
그래서 언젠가부터 마음의 평화가 급격하게 깨지는 상황이 오면 다시 한번 이 구절을 떠올린다.
새로운 광물이다!! 지금 새로운 광물을 찾았다!!
마치 희귀한 포켓몬을 발견하듯이. 주섬주섬. 오늘은 이런 광물 표본을 주웠구나, 새로운 아이템처럼 생각(하려고 매우, 몹시도 노력)한다. 허허. 껄껄. 뭐, 그러다 보니 제법 담담해져서 과거에 수집한 광물을 보며 그랬구나- 하고 회상하는 순간도 있다. 오늘의 광물은 또 내일의 추억이 될 테지.
그리고 또, 수많은 광물 표본을 수집하면서 새로이 발견하게 되는 작은 취향들도 분명 있다. 예를 들자면 노란 조명 하나에 의지한 채 읽는 책, 따뜻한 크루아상과 고소한 커피, 귀에 내려앉는 누군가의 감미로운 노래, 택배가 도착했음을 알리는 띵동- 소리, 좋아하는 영화와 함께 홀짝대는 와인 같이 사소한 것들. 그 무엇보다도 마음을 포근하게 만드는 행복한 순간들.
세상에 무조건 좋거나 무조건 나쁘기만 한 일은 없다고 했다. 모든 일은 생각하기 나름이기에. 열심히 일한 후에 맛보는 휴식이 더 달콤한 것처럼, 다양한 인간 군상 속에서 내 모습을 발견하는 일이 더 행복하다. 덕분에 취향을 새로 발견하게 되고, 덕분에 사소한 것으로부터 행복을 느끼게 되니, 좌절을 겪거나 광물을 수집하는 경험은 그렇게 나쁜 일만은 아니다.
현실에는 완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완벽해지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사실을 자주 잊어버린 채 완벽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믿음에 빠져 맹목적으로 달려들 때가 바로 완벽을 향한 열망이 나를 망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 누구나 실수와 실패를 반복한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완벽은 신의 영역이지 인간이 닿을 수 있는 데 있지 않다.
(...)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다.
- 마음의 사생활 中
그러니 이왕이면 웃자. 이왕이면 행복하자.
원래 세상은 요지경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