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래서 반도체는 주식(Staple food)이고 주식(Stock)이다.
2022년 10월 출간되었는데 이제야 이 책을 읽어보다니. 내가 책을 고르는 안목이 없었으니, 내 주식도 형편없을 수밖에. 이 책이 출간된 당시 엔비디아(NVIDA)의 주가는 110$ 정도였고, 지금 (어제 4/19 무려 10% 폭락을 했음에도) 762$ 로 마감하였다. 18개월 사이에 7배. 이 경이로운 성장에 더욱 이 책에 손길이 갔다.
Intel, AMD, ARM, Samsung, SK Hynix, Sony, Phillips, ASML, TSMC, SMIC, Huawei, Toshiba, Nikon, Canon 등등. Amazon, Apple, Google 등의 빅테크기업, 그리고 The United States, Pentagon, DARPA, Silicon Vally, China, PLA (People's Liberation Army), Taiwan, Japan, South Korea, Singapore.. 공학을 전공했고 과학에 관심 있고 미국 AI 관련 하이테크 기업 주식을 갖고 있다면 모두 익숙한 이름들인데 모두 이 책에서 수 없이 반복되는 기업과 관련 국가들이다. (난 이 세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다)
저자 크리스 밀러(Chris Miller)는 아마도 공학도이며 저널리스트가 아닐까라는 예상과 달리 놀랍게도 하버드대학교에서 역사를 전공했고 현재 국제관계학 대학인 플레처 스쿨에서 국제사를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자칫 공학출신 작가가 기술 개발의 변천이력으로 흘러갔다면 기술서적 한편에서 빛을 발하지 못했을 수 있겠지만 국제관계를 바탕으로 반도체가 어떻게 성장해 왔고 왜 중요하게 되었는지, 왜 전쟁을 벌여야 할 만큼 중요한 자원이 되었는지를 이리도 흥미롭게 술술 풀어놓았으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게 되었다. 석유를 둘러싼 패권전쟁의 첨단기술버전으로 볼 수 있겠다.
War라는 단어만큼 치열한 경쟁을 표현하는데 적절한 건 없는 것 같다. 베트남 전쟁에서 보기 좋게 쓴 맛을 보고 자존심을 구긴 미국. 병참선을 끊기 위해 Thanh Hoa Bridge에 수 백발의 폭탄을 떨어뜨렸음에도 어느 하나 명중하지 못하고 주변에 수많은 구멍자국만 남긴 사진을 들고 미 국방부는 이제 막 반도체라는 걸 개발했지만 이걸 어디에 쓸지, 투자처를 찾지 못했던 TI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사를 불러 이렇게 요청한다 "Could Texas Instruments do anything to help?" 센서와 레이저 그리고 이를 계산하는 반도체가 달린 목표물을 찾아가는 미사일의 개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역사적으로 전쟁, 특히 20세기로 들어오면서 전쟁은 새로운 기술 개발의 이유이자 목표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당신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기 때문에 적보다 앞서 나가야 하는 건 생존의 문제였다. 모든 과학 기술의 응용분야는 전쟁무기였다. 항공기가 그렇고 차량이 그렇고 적을 찾기 위한 레이더기술, 명령을 위한 통신기술, 위치를 파악하기 위한 GPS 기술,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인터넷기술 등이 모두 군사용으로 개발되었다가 민간으로 활용처를 옮겨간 사례들이다. 그리고 그 개발 속도의 이면에는 반도체가 자리 잡고 있다.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고도의 과학 지식과 이를 구현하고 투자 효율이 나오도록 저렴하고 높은 수율로 만들기 위한 공학 지식, 높은 정밀도가 요구되는 초정밀 설비 기술, 높은 순도가 필요한 화학/재료 공학 기술 등 그리고 이러한 자재들이 어느 한 나라, 어느 한 회사가 모두 가지고 있는 게 아닌 수많은 국가에 흩어진 수많은 요소기술을 가진 기업들의 기술을 집약해야 하는 Supply Chain을 꿰어내지 않으면 만들 수 없는 부품이다. 반도체를 설계하기 위한 설계 프로그램 (이것도 모두 미국 회사다), 설계도대로 만들어내는 생산능력 등까지 아우르면 그 구조는 더 복잡해지는데 이제 여기에 정치(Politics)가 더해졌으니 반도체를 만들고 싶다면 먼저 미국의 허락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총 54개 콘텐츠로 각 콘텐츠당 3~4 페이지로 배분된 부분은 책장을 넘기는데 지루하지 않게 해 준다. 많은 콘텐츠 중에서도 [My Enemy's Enemy: The Rise of Korea]는 삼성의 성장에 대한 얘기를 담고 있어서 더 눈길이 간다. 미국 태생의 반도체가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저렴한 인건비와 그들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미국의 DRAM 분야의 경쟁자로 급부상하며일본 때문에 망한 미국 기업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미국은 동맹관계를 떠나 그런 급속한 발전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고 반도체 분야를 해보겠다고 선언하고 사업을 확장해 나가고 있는 한국의 삼성을, 이병철 회장을 적극지원하게 된다. 물론 삼성의 의지만으로 지원을 한 건 아니다. 당시 한국은 미국 일본 반도체의 소비국이었으니 최소한의 기술지식은 가지고 있었고 정부의 지원도 한몫을 했다. 미국은 미국에서 유학한 교수진을 갖춘 KIST설립을 도왔다. 도와주면 따라올 만한 아이인지 볼 때 한국은 그만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본 것이다.삼성은 마이크론의 64K DRAM 라이선스를 구입을제안했고 자금에 목마른 미국기업은 첨단기술이전에 대한 우려를 고민할 형편이 아니었기에 삼성반도체는 그렇게 시작하게 되었다. (지금 DRAM 시장점유율은 삼성 45%, SK하이닉스 31%, 마이크론 등이 나머지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을 견제하려는 움직임은 또 다른 결과를 이끈 사례는 더 있다. 반도체 공정의 핵심설비인 리소그라피* 회사 네덜란드의 ASML이 최강의 자리를 굳히게 된 것 또한 적극적인 미국 고객의 요구가 있었기 때문인데, 여기에도 일본이라는 나라에 의존하게 될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의도도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 리소그라피: 반도체 회로를 웨이퍼에 새기는 장비. 현미경이 작은 걸 크게 보게 해주는 도구라면 리소그라피는 이를 뒤집어 큰 설계도를 작게 축소시켜 회로를 그리게 한다. ASML 이 작년 출시한 1~2 나노급 EUV 설비 한 대의 가격은 약 5천억 원이며 크기는 시내버스 2대 정도 크기를 가지고 있다. 1년에 약 60대 정도를 생산. 각국 정상들, 반도체 기업 수장들이 적극 달려가서 구애를 하는 이유이다. 중국이 이 설비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20년은 걸리지 않을까 극히 회의적으로 보고 있다. 물론 20년 동안 1위 업체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는 가정하에.
중국과 러시아, 두 반미 동맹들의 따라잡기 노력도 힘겨워 보인다. Copy 전략을 외치며 핵심 장비를 구입하고 기업 인수 합병을 통해 혹은 추정키로 '훔쳐서라도' 반도체 기술을 하나씩 점령해 나가고 있지만 위에서 설명한 복잡한 Supply Chain과 노하우까지 흡수할 수는 없기에 그 한계가 느껴진다. 코로나로 우한 도시 전체가 폐쇄되었을 당시에도 반도체 연구소 인력들만이 유일하게 이동을 허락했다는 사실도 소개된다. (하지만 중국의 저력을 간과해서는 절대 안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중국과 미국이 서로 협력해서 Win-Win 하기를 바란다. 그게 중간에 끼어있는 대한민국에게는 최상의 환경이라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중국이 설사 민주화를 하더라도 미국은 새로운 명분으로 중국과 대립각을 유지할 것이라고 본다)
대만해협을 두고 벌어지는 미국-중국의 신경전을 알리는 뉴스가 좀 더 새롭게 보인다. 동맹의 이유에 반도체가 하나 더 추가되었음은 분명하다. TSMC를 지키지 못하면 미국의 인공지능 개발에 지체될 수 있고, 반대로 TSMC를 손에 넣게 되면 중국의 인공지능을 비롯한 네트워크, 첨단무기 등의 개발에 속도를 낼 수 있다.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을 보고 있자면 대만 중국 전쟁의 가능성이 낮지만 가능성이 없다고는 하지 못할 듯하다. 미국은 석유를 지키기 위한 전쟁을 벌이듯 이제 반도체를 지키기 위한 전쟁을 각오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좀 더 안전한 방법으로 TSMC, 삼성, 하이닉스 등의 회사에 수 조원의 보조금을 지원하며 미국 내 공장을 짓도록 유도하고 있고 실제로 새로운 첨단 공장이 착착 진행되고 있기도 하지만 진정 핵심 기술은 여전히 대만과 한국에 있다는 점에 미국은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책을 덮고 나니 전쟁은 필요악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책의 시작부터 끝까지 전쟁이었다. 적이 있고 이겨야 하는 경쟁이 있었기에 기술개발의 모멘텀이 된 점만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오펜하이머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