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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yYu Oct 13. 2024

노베첸토

음악이 있다면 그곳이 나의 세상

부드먼 T.D. 레몬 노베첸토. '단 한 번도 배에서 내리지 않는' 피아니스트, 단숨에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맥스는 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보스턴 항구에 도착한 어느 날 아침, 승객들이 모두 내린 뒤 일등석 연회장 그랜드 피아노 위 상자 안에 들어 있던 태어난 지 열흘 남짓 된 것 같은 아기를 발견한다. 누가 남긴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아마도 배에서 출산하였고 새로운 땅에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처지에서 같이 살아갈 자신이 없거나 혹은, 서류 한 장 없는 아이 때문에 혹시나 입국이라도 거절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부모는 마지막 애절함을 담아 일등실에 두고 갔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그렇게 노베첸토의 삶은 배 위에서, 피아노 위에서 시작되었다.

 

    가족도, 국적도, 생년월일도, 출생서류도 없는 아이. 사실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나의 도시 같은 거대한 배 버지니아호 안에는 여행을 즐기는 일등석부터 새로운 기회의 땅으로 향하는 삼등석 손님들을 태우고, 그들의 꿈을 태우고 대서양을 건넌다. 그리고 그 배를 움직이기 위해 삼등석보다 더 깊은 곳, 막장 같은 기관실 밑바닥에서 선원들이 있고 그곳에서 생활한다.


    거센 풍랑을 맞은 어느 날, 배에서 휘청거리며 정신을 차릴 수 없는 나와 달리 평온히 해변을 거니는 듯한 걸음걸이의 28살 그가 내게로 왔다. 연회장으로 데려간 그는 피아노 고정장치를 풀고서 옆에 나란히 앉고 연주를 들려준다. 왈츠처럼 은은하고 감미로운 피아노 솔로. 이 소설은 이렇게 처음 만난 친구 노베첸토에 대한 이야기를 내레이터처럼 담담히 읽어 내려가는 친구 맥스의 입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다.  


    노베첸토의 피아노 연주는 간결하고 아름다웠다. 어디서 피아노를 배웠는지도 알 길은 없었다. 노베첸토는 사람들의 마음을 읽고 생각을 피아노로 표현해 내는 능력만큼은 천재적이었다. 한 번도 배에서 내린 적이 없었지만 그는 피아노를 통해 여행을 한다. 런던과 파리를 다녀왔고 눈 덮인 산에 올랐고 세상에서 가장 큰 교회도 다녀왔다. 피아노 88 건반에서, 선실에서 연주에 둘러싸인 사람들의 눈을 통해서 세상을 모두 들여다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보기 위해 더 많이 몰려들었다. 그의 유명세를 못마땅히 여긴 '재즈의 창시자'라 불리고 자존심 강했던 '젤리 롤 모던'의 귀에 들어갔고, 그와의 화려한 선상대결도 펼쳐진다. 물론 대결의 결과는 음악의 승자가 누구인지 다시 한번 밝혀줄 뿐이다.




    하지만 그런 그의 영광스러운 모습도 친구가 보기에는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겠으니, 바깥세상에서 기다리고 있을 더 많은 아름다움, 그리고 거기에서 누릴 수 있는 노베첸토의 더 큰 영광, 그의 새로운 가족, 노후의 삶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배 안에서만 살 수는 없잖은 일이 아닌가? 맥스의 설득에 노베첸토는 배에서 내릴 결심을 한다. 그리고 도착한 항구에서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계단을 내려온다. 한 발짝, 두 발짝, 하지만 세 번째 계단에서 멈추고서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모자를 벗어 바다에 떨어뜨리고는 다시 배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무엇이 그를 뒤돌아서게 만들었을까? 무엇이 그를 다시 배 안으로 끌어당겼을까?


    난 이 배에게 태어났어. 여기서도 세상은 지나가. 단, 매번 2000명만큼의 세상이지. 여기에도 욕망이 있어. 뱃머리와 선미 사이에서나 가능한 것, 그 이상은 아니지만, 유한한 건반으로 행복을 연주했어. 난 이렇게 사는 법을 배웠어. 내게 육지는 너무나 큰 배야. 어마어마하게 긴 여행이야.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자야. 너무나 강렬한 향기야. 내가 연주할 수 없는 음악이야. 날 용서해. 난 내려가지 않을 거야. 다시 돌아가게 날 내버려 둬. 제발.


    맥스는 육지의 삶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시간은 흘렀고 세상은 전쟁을 겪었고, 병원선으로 활용된 버지니아호도 노후를 버티지는 못한다. 결국 폐선이 결정되고 다이너마이트를 잔뜩 싣고 바다 한가운데로 나갈 것이라는 얘기를 듣게 된다. 맥스는 그가 아직도 배에 있고 내리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고 그를 찾아 나섰고 그리고 예상대로 아무도 없는 배 안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된다. 폭약 위에서 서로 마주 앉아 담담히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피아노를 생각해 봐, 건반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어. 우리 모두 그게 88개라는 걸 알지. 건반은 무한한 게 아니야. 당신, 당신은 무한하고 그 건반들 속에서 무한한 것은 당신이 만들어내는 음악이야. 건반은 88개이고 당신은 무한해. 난 이런 게 좋아. 사람은 무한하게 살 수 있지.




    간간히 피식. 웃게 만드는 유머는 작가 바리코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애착을 준다. 간결한 피아노 곡 'Magic Waltz' 만큼이나 간결한 85페이지의 책 속에 한 사람의 일생이 있다. 그리고 피아노가 있다. 음악이 있다. 책 속에서 Magic Waltz를 언급하지는 않는다. 소설을 영화화한 '피아니스트의 전설(1998)'에서 풍랑에 흔들리며 아슬아슬하게, 그리고 결국은 큰 사고를 치고 마는 장면에서 노베첸토 (나인틴 헌드레드, 1900)와 맥스의 멋진 첫 만남에서 연주한 곡이다.





피아노에 대한 꿈이 있다. 음악에 더 가까이 가고 싶은 꿈.


손 끝에서 전해오는 상아 건반에서 오는 기분 좋은 느낌과 미묘한 탄력성, 그 감각과 가를 살랑거리는 감미로운 소리가 서로 맞아떨어질 때 느끼는 짜릿한 경이로움을 오롯이 내가 만들어냈다는 행복감이 있을 때, 비로소 그 꿈에 한 걸음 더 가까이 갔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참으로 가슴 벅찬 일이다.


 버지니아호는 그 꿈으로 충만한 시간과 공간이다. 언젠가 나도 이 배에 오르고 싶다. 


모든 뒤로하고 홀로 배에 오를 자신은 없지만, 짧은 시간이라도 번쯤 보고 싶은 일이기도 하다.

배에서 내리려면 먼저 배에 올라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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