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이딩은 경력이 될 수 있을까?
은행과 증권사를 오가며 커리어의 구간구간, 쉼표들마다 트레이딩을 유일한 업(業)으로 삼고 있던 시절. 소위 말해 '무직 전업투자자'의 나날을 보낼 때마다 끝없이 나를 괴롭히던 생각이었다. 트레이딩이라는 것이 어찌 보면 경력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다르게 보면 그저 도박장에서 매일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17년부터 계속 퀀트 업계에 몸담았다면 모델링이나 아니면 최소한 코딩이라도 배우고 숙련시킬 수 있었을 것이고, 리서치 애널리스트로서의 길을 택했다면 지금보다 더 수준 높고 구체적인 접근법을 다룰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스페큘레이터로서의 삶을 택했고 온갖 시장의 잡다한 지식과 경험에 의한 직관을 조금 알았을 뿐, 대부분의 배움은 주가의 등락에 따른 각종 마음의 고초를 견디는 법, 즉 극기심(克己心)에 대한 고찰이었다.
*스페큘레이터(Speculator): 가격의 등락을 예상하고 베팅하는 투기성 매매자
물론 트레이더가 취업이나 이직을 위한 경력을 신경 쓴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 일 수도 있다. 트레이더에게 필요한 능력이란 '어떠한 수단으로든 많은 돈을 따오는 것'이고 그들의 세계에선 그들이 벌어온 돈이 담긴 계좌 레코드가 그들의 경력이자 가장 직관적으로 능력을 입증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경력이라는 것은 남이 주는 봉급으로 먹고살기 위해 나의 몸값을 높이는 일이기 때문에, 본인이 책임져야 할 범주(본인, 혹은 가족)를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생산성을 가진 트레이더라면 굳이 경력이란 것에 연연할 필요 없이 오직 트레이딩에 집중해 필요치 이상의 생산성을 이끌어내기 위한 노력만을 하면 된다.
그러나 문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요구하는 수치는(필요한 자금은) 늘어만 가는데 대부분의 리테일들이 생산성을 안정적으로 유지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초심자의 행운을 비롯한 이런저런 외부적 요인으로 초기 몇 달 높은 승률과 수익을 기록하는 것을 보고 성공을 다짐하며 자신의 삶을 전업투자에 올인하는 이들은 대개 3년 안에 시장의 매운맛을 보고 모두 정리하게 된다.
*리테일(Retail Trader): 개인 전업투자자를 일컫는 말
생존에 실패한 트레이더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별로 남지 않았다. 이 바닥에 들어오기 전에 가던 길이 있다면 조금은 수월하겠다만 전업투자를 택해 소모한 기간은 그저 길고 긴 경력단절의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뿐이다.
성공적인 트레이더로 살아남더라도 이들이 사회에 나와 무언가 타이틀을 가진 일을 하기란 쉽지 않다. 펀드매니저나 프랍을 꿈꾸는 전업투자자들이 많으나, 자산운용사들도 대개 사내 경력직 애널리스트나 우수한 주니어들 중에서 채용해가지, 무경력 무직 상태의 개인투자자를 오직 레코드만 보고 덜컥 채용해버리는 운용사는 더 이상 찾아보기 쉽지 않다. 이마저도 운용역에 대한 수요가 있을 때의 이야기다.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적으로 프랍 데스크가 사라지는 추세에서 과연 후천적으로 진화시킨 도박꾼의 기질을 어디에서 인정해주느냐는 말이다. 소규모 사모펀드(이하 부띠끄)를 제외한 그 어느 곳에서도 스페큘레이터에 대한 수요는 없다.
*프랍(Proprietary Trader): 고객의 돈을 운용하는 펀드매니저와 달리, 회사의 자기 자본을 직접 운용하여 수익을 내는 직업.
지금까지 내가 여기에 투자한 시간과 비용이 얼마인데!
한번 이 바닥에 들어오면 매몰비용에 대한 집착 때문에 쉽게 포기할 수가 없다. 자신이 지금 실적이 나지 않고 있음에도(돈을 벌고 있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시장에 대한 '수업료'로 치부하며 성공에 대한 망상을 버리질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계속해서 자신의 손해를 만회하기 위한 강도 높은 베팅을 이어가고 그 말로는 언제나 동일하다. 카지노에서 가진 칩을 다 잃으면 자연스레 퇴출된다.
나 역시 오랜 기간을 무직 전업투자자로 살아왔고, 지금도 여전히 수익의 대부분은 투기성 상품의 매매를 통한 투자손익에서 비롯된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어렵사리 생존에 성공해있지만 계속해서 투자 이외의 다양한 수익모델을 개발하고자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싶다기보다는 내 모든 삶을 오직 트레이딩에 걸고 끝없는 베팅을 이어가는 무한한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트레이딩이 유일한 수익원인데 매매가 잘 풀리지 않을 때면 생기는 - 심리적 압박감, 가중되는 스트레스, 우울과 무기력의 무한한 악순환 - 그러한 불필요한 무게들을 더 이상 짊어지고 싶지 않다.
세상 모든 이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투자에 대한 공부는 필수 불가결하다 생각하나 이에서 더 욕심을 내어 오직 투자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겠다는 마음가짐은 다소 오만에 가까운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