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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리 Jul 30. 2023

챗GPT의 시대에 발터 벤야민 읽기

2023.7.30.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읽고 독서모임을 했다.


멤버 구성이 굉장히 재밌었는데, AI 개발자, MCN 전략기획, 재무 담당자, 번역가 겸 작가, 미술 전공자 출신 PD, 스타트업 미디어 기자 등이었다. 개발자와 미술 전공자를 양 끝단으로 해서, 그 사이에 예술과 관련된 것들로 돈을 버는 여러 포지션의 사람들을 총망라한 느낌.


워낙 전문적인 독해력을 필요로 하는 논문이라서... 솔직히 제대로 이해는 못 했다. 그냥 '생성형 AI의 시대에 예술이 어떻게 될까?'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생각하고 참여했다. 사진 기술이 처음 등장하던 시기처럼, 우리 역시 생성형 AI라는 혁신적 대량복제 기술이 새로이 등장한 시기를 살고 있으니까.



논문에서 중요한 건 '아우라'라는 개념이다.


즉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가능성의 시대에서 위축되고 있는 것은 예술작품의 아우라이다.


지금-여기 존재하는 예술품 원본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가치. 사진과 같은 대량복제 기술은 예술의 아우라를 붕괴시키고 대신 대중성을 강화했다. 그리고 지금, 생성형 AI의 등장으로 예술 작품들은 또 다른 차원의 아우라 파괴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전에는 그래도 사람이 힘들여 만든 원본이 있어야 했다면, 이제는 그 원본(?)조차 생성형 AI가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과연 우리는 '아우라'를 포기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나왔다. VR 디바이스와 디지털 기술을 통해 직접 가는 것만큼 생생하게 공연을 보고 들을 수 있다면, AI가 만들어낸 글이나 그림이나 음악이 사람이 만들어낸 것과 비교해도 전혀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훌륭하다면. 기능적으로 전혀 부족하지 않다면 진품을 욕망하지 않게 될까. 다들 아닐 것 같다고 대답했다. 정말 아우라라는 것이 있다고 느껴서 그렇든, 아니면 그냥 '가짜 말고 진짜를 갖고 싶다'라고 인지해서 그러는 거든.


산업과 기업에 관한 기사를 쓰는 나의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관찰하기로 인간들은 아우라를 포기하지 못하더라'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했다. 온라인 영상 클립들이 무료, 혹은 저가에 풀리는 동안 오프라인 현장 티켓은 훨씬 비싼 가격에 팔린다. 아무리 온라인에 무수한 이미지 파일들이 돌아다녀도 하이엔드 시장에서는 화가의 작품이 고가에 팔려 자산가의 거실에 놓인다. 소비자들은 같은 값이면 진짜 사람이 직접 한 것, 같은 값이면 보다 진짜, 원본, 오리지널에 가까운 것을 찾았다. 그쪽이 항상 더 비쌌다. 온라인으로 가능한 것이 많아질수록 오프라인 경험은 프리미엄으로 취급받았다.


물론 이는 정말 아우라라는 게 존재하고 그것이 차별적인 선호를 이끌어내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사람들이 '진품이 더 좋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코스트코 쿠키를 수제 쿠키로 속여서 판다고 해도 진상을 모른다면 '역시 수제 쿠키라서 맛있군'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듣다 보니 사람들이 진품과 복제품을 구분하는 기준은 크게 두 가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서사. 즉 그 제품들이 만들어진 과정. 다른 하나는 품질. 보통은 진품의 퀄리티가 월등하기 때문에 진품이 보다 가치 있다는 게 논쟁의 여지가 되지 않는데, 품질 면에서 복제품이 진품과 별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능가하게 된다면... 그때 '굳이 진품이라는 게 중요한가?'라는 논쟁이 떠오르는 게 아닐까 싶었다. 작년 11월에 공개된 오픈AI의 GPT 3.5는 그 논쟁을 촉발시킬 정도로 우수한 퀄리티를 보여줬던 거고.


여기에 예술의 고질적인 고민거리인 먹고사니즘이 합류하면 더 골치 아파진다. '요즘 시대의 창작자들은 작품의 아우라를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창작자들이 예술성 있는 작품을 만들려고 애쓰는 것을 포기하고, 대중과 시장이 원하는 잘 팔리는 결과물을 만드는 것 같다는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미술이든 문학이든 음악이든 예술 그 자체는 전혀 산업 분야라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예술적 산출물을 활용해 수익을 내는 산업 분야들이 존재할 뿐이지. 예술가들이 원하는 본인의 포지션과 산업에서 원하는 그들의 포지션은 언제나 결이 안 맞았다. 그 결과로 예술가들은 늘 '예술로 먹고살고 싶다'와 '돈 안 되는 짓 그만하자' 사이에서 고민해 왔고. 진짜 예술 같은 걸 하고 싶다면 그게 수익과 직결되지 않을 거라는 점은 각오하고 시작할 수밖에 없다. 돈을 벌고 싶다면 '아우라' 있는 작품을 만드는 걸 우선할 수 없는 거고.


이런 상황에 생성형 AI가 등장했다... 그렇다면 이 기술은 산업 분야에 어떻게든 본인들을 맞춰 가며 아우라 없는 산출물을 내 오던 예술가들의 밥그릇을 뺏게 될까?


물론 기술을 경쟁 상대로 보는 시각은 사실 별로 생산적이지는 않다. AI와 대결한 인간의 조상쯤 되는 게리 카스파로프는 '이길 수 없다면 함께 하라'는 내용의 책을 낸 적 있다. 2005년 인간과 컴퓨터가 함께 팀을 이뤄 경기하는 '어드밴스드 체스' 경기에서 우승자는 가장 뛰어난 체스 기사가 있었던 팀도 아니고, 가장 뛰어난 컴퓨터가 있었던 팀도 아니고, 인간과 컴퓨터가 협력하는 방법에 집중한 팀이었다고.



기술의 미래를 낙관하는 사람들은 기술에 대체당할 것이 아니라 기술에 올라탈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곤 한다. 당연히 그런 미래도 가능해 보인다. 기자들은 기획이나 취재에 시간을 쏟고, 긴 본문을 작성해야 하는 노고를 생성형 AI에게 떠넘기는 식으로. 웹툰 작가들도 스토리 진행이나 연출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하고, 배경이나 작화 작업은 AI 툴로 빠르게 끝내는 식으로. 어떻게 툴을 활용해 그 이상의 결과물을 만들어낼지 고민하는 식으로. 그렇다면 앞으로 예술가란 그림이나 문장 테크닉 자체가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예술적인 기획 자체를 해낼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할 거다. 예술가의 범주 자체가 바뀔 거다.


그런데 과연 현실에서 기술이 그렇게 아름다운 방향으로만 작동할까. 만약 기업에서 최소한의 영역만 직업-창작자들에게 일을 시키고 나머지 영역은 직접 툴을 써서 만들어 버린다면? 대부분의 경우 직업-창작자들은 협상력 낮은 개인 노동자일 뿐이다. 이 책을 관통하는 질문으로 '기술이 발달했는데 왜 우리가 바랐던 세상은 오지 않을까?'를 꼽은 멤버가 있었는데, 나는 그 답이 '자본주의의 생리를 간과했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기록해 두고 싶은 이야기는 아우라를 규정하는 것으로서 '작가의 서사'의 중요성. 예를 들어 영국의 현대예술가인 데미안 허스트는 동물의 시체를 유리 상자 안에 넣어서 전시하는 등의 작품들을 선보였다. 이런 작품들은 작가가 직접 다 작업했을 리 없고, 분명 조수나 다른 사람들의 손을 썼을 것임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이 작품에 아우라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여전히 이 작품들은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들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개념이고 서사다. 이런 경우에는 대량복제 기술 같은 것이 작품의 아우라를 해쳤다고 볼 수 없지 않을까.


그렇게 본다면 어쩌면 '작가의 서사'란 디지털 시대에 유일하게 유효한 아우라의 원천일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삶이란 대량복제가 불가능하니까. 다만 여기까지 생각하니까 더 아찔해지는 기분이었다. 결국 이 영역조차 개인 브랜딩이라는 이름으로 마케팅의 테두리 안에 들어가 있거나, 인플루언서라는 이름으로 이미 팔리고 있는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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