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우리들>을 보고,
영화는 집요하게, 그러나 한 발자국 떨어져서 선이의 얼굴을 비춘다. 마치 선이가 마주한 상황은 그 아이만이 감당해야 하는 어떤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렇게 잔인한 영화였던가. 영화 <우리들>을 보고 난 후의 나의 감상이 딱 그랬다. "나한테 화난 거 있어?" 나 또한 학창시절 학교라는 생태계 속에서 무수히 던지고 들었던 질문. 영화를 보니 윤가은 감독이 내 유년 시절 이야기를 알고 있는 것만 같아 얼굴이 붉어졌다.
선이는 친구가 없다. 단짝친구가 없고 반에서 주류라고 보여지는 친구들에게서 짖궂은 장난도 당한다. 그런 선이가 여름 방학 때 새로운 친구, 지아를 만나게 되고 깊은 관계 맺음의 과정을 영화는 응시한다. 이번에도 한 발자국 떨어져서.
두 아이는 닮은 듯 다르고 다른 듯 비슷한 상처를 가지고 있다. 결핍의 상처를 직시하며 건강한 관계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여름 방학이란 시간이 너무 짧았던 탓일까. 개학을 하고 선과 지아의 관계는 파국을 맞이한다. 교실이라는 세계에 존재하는 철저한 약육강식, 지독히 날것의 생태계, 보이지 않는 감정의 물결, 11살이라는 '우리들'이 겪어 내야 하기엔 너무나 거대하다. 오해의 골은 더 깊어지고 나눴던 각자의 결핍이 서로를 생채기내기 위한 무기가 되는 비극이 일어난다. 이러한 과정에서 무너지지 않는 영화의 중심은 선이에게 있다. 겨우 11살이라곤 믿기지 않는 선이는 딸로서, 누나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다. 친했던 지아에게 세미(?) 괴롭힘을 당할 때도 그녀는 상처는 받아도 무너지진 않는다. 참으로 놀라운 캐릭터다. 영화를 보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소회는 나는 지아였던 적도 보라였던 적도 있지만 선이였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라는 것이다. 과거 왕따의 경험이 있는 지아는 교실에서의 철저한 생태계를 이해하고 약육강식의 진리 속에서 살기 위한 선택하고 몸부림친다. 선이의 선택은 살아남기가 아니다. "그러면 언제 놀아?"라는 동생 윤이의 물음처럼 그저 놀고 싶어서, 좋아하는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아서, 진심으로 우리들의 상처를 이해해서 선이는 선택하고 움직인다. 그렇게 선이는 무너지지 않는다. 깊게 응시할 뿐이다. 그녀도 "나한테 화난 거 있어?"라는 멘트를 기어코 하며 을이라는 위치를 가져가지만 "오해는 풀고 가야지."라며 갈등을 직시할 줄도 안다. 끝내 본인의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하고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아빠의 뒷모습을 볼 줄 아는 아이, 선이. 그렇게 선이는 "한지아 금 안밟았어"라며 한 때 적이였던 친구를 포용하고 용서한다. 손톱 끝에 남아 있는 보일듯 말듯 한 봉숭아 물을 혼자 바라보면서.
햇빛에 반짝이는 개울가의 물소리, 아이들의 어설픈 뜀박질, 관자놀이에 맺혀 흐르는 땀방울, 바닥에 가슴을 붙이고 엎드려 먹는 수박 맛, 손바닥만큼 들어오는 햇빛을 바라보는 베란다, 이 모든 여름방학의 감각. 아이들은 그렇게 땀이 나는지도, 여름방학이 끝나는 지도 실감하지 못한 채 관계에 몰입한다. 영화는 극단적으로 아이들의 얼굴을 줌인으로 비추거나 넓은 공간 속에 자연스럽게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을 배치한다. 반면 부모님, 선생님과 같이 영화에 등장하는 어른들은 마치 유령화자처럼 프레임 밖으로 일부분이 짤리거나 실제로 극 중에서도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 선이의 부모는 그들의 자식과 윗세대까지 책임져야 하는 녹록치 못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아이들이 무슨 문제가 있어', '말을 해야 알지'라는 무책임하고 말 뿐인 대처밖에 해 줄 수 없는 것이 어른들 또한 관계가, 삶이 고단하기 때문이다. 관계는 항상 어렵다. 나이가 든다고 횟수가 늘어나는 만큼 능력치가 비례하지 않는다. 진심은 늘 통한다는 데 시간차가 있고 오해는 필연적이다. '우리들'은 2명 이상을 가리키는 일인칭 대명사로 나와 너가 포함되어 있다. 우리라고 누가 나를 포함해서 본인을 지칭한다면 친밀감과 결속감이 느껴지는 반면 관계를 구분 짓는 것 또한 우리들이란 울타리이다. 그만큼 우리는 관계에 있어 보수적이고 상처받기 두려워하는 방어기제를 가지고 있다.
선이는 지아에게 팔찌를 주고, 봉숭아 물을 들여주고, 자신을 괴롭혔던 보라에게 메니큐어를 받는다. 지아는 선이와 물든 봉숭아 손톱을 지우고 형형색색의 메니큐어를 칠한다. 지울 수 없는 선이와의 관계에 새로운 관계를 덧댄 느낌이다. 이렇게 우리들의 관계와 우정을 영화는 다양한 은유로 보여주는데 어쩐지 조금은 지저분하게 지워지는 메니큐어보단 희미하게 바래지는 봉숭아 물에 더 마음이 쓰인다. 봉숭아 물이 예쁘게 들기를 바라며 나란히 누워 함께 바다를 보러가자고 약속했던 그 시절의 선이와 지아처럼 말이다. 각자의 상처를 눈치 채 내밀한 고백속에서 나와 너가 우리가 되는 아름다운 경험을 할 수 있으면, 무너지지 않는 진심의 얼굴이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