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학 수업을 들으며
미대 수업으로 색채학을 신청해서 듣고 있는 중이다. 타과생이 나까지 2명밖에 안 되는 수업이라서 학점이 걱정되기도 하지만, 한 번쯤은 다른과의 무슨무슨 학學같은 수업을 듣는 게 대학에서 해보고 싶었던 목록 중에 하나였던 터라 잘 듣고 있다. 이론이니까, 지금까지는.
작품을 하나 찾아 비평해야 하는 발표를 준비하면서도 나는 다채로운, 컬러풀한 그림을 찾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검은색과 회색과 흰색은 무채'색'이라는 생각은 교수님이 컬러풀을 원할 것이라는 추측에 가로막혔다.
색, 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빨주노초파남보의 무지개 색이 떠오른다. 여기에 검은색은 없다. 뉴턴의 프리즘은 백색을 쪼갰고, 쪼개진 색이 안료로 합쳐져서야 검은색이 되었다. 오묘하지 않나. 색을 처음 배울 때는 자연의 '빛'에 대해서 먼저 배우지만, 예술에선 우리는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고 거기에 반사되는 빛을 감상한다.
나도 물론 풍부한 색이 좋다. 눈의 즐거움이 섬세한 색의 구분을 통해 극대화 되는 경험. 하지만 무채색에 대해 조금 억울해하자면, 식물 세밀화와 같이 섬세한 작업이 필요한 작품들은 주로 흑백이 많고, 흑백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다. 쉰들러 리스트의 붉은 치마 소녀는 영화에서 유일하게 '색깔'이 입혀져 있고, 쭉 보다 보면 그 거의 없는 색채가 오히려 한 발짝 멀어져서 영화를 지켜보게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을지도 모른다. 그럼 내 발표를 명암 짙은 소묘로 할까, 그래도 그건 아니다.
흰색과 검은색의 사이라서 애매하다는 회색은 '색채'에서도 그 역할에 최선을 다한다. 색이면서도 색에 속하지 못하는. 회'색'도 회반죽의 '색'이라는 꿍얼거림은 그저 꿍얼거림으로 남아있다. 회색의 애매함이야 말로 이 매거진이 찾아가는 이야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