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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그림자 Jul 13. 2019

히말라야 트래킹 후기.

비워야 채울 수 있다.


반년 전 겨울에 쓴 글.

겨울에 휴가를 얻어 2주간 네팔을 가려고 했다. 1년 전 랑탕에 2주간 다녀왔기에 이번엔 안나나 쿰부 둘 중 하나를 놓고 고민 중이었다. 그 와중에 휴가차 남미에 간다던 선배의 말
“네가 3주만 집에서 허락받으면 나도 네팔로 코스를 바꿀 의향이 있다. ㅎㅎ”
선배는 유명한 전문 산악인이시고 난 랑탕 한번 다녀온 초보 트래커다. 선배는 ght를 해보고 싶어 했다.
네팔 서쪽 끝부터 시작한다고 했다. 난 고민 끝에 와이프에게 눈물의 허락을 얻어 선배와 3주간 동행했다. 나는 다르출라-라라호수까지 가는 걸 목표로 하고 선배는 나보다 1주일 더 걸어 주팔까지.

안나푸르나나 쿰부는 다음에도 기회가 있겠지만 네팔 서부는 이번 아니면 평생 못 가볼 듯싶어 무턱대고 동행을 결정했다.

12월 5일에 카트만두 도착, 6일에 단거디 비행기로 이동, 7일에 단거디- 다르출라 지프로 12시간 이동
결국 3일 걸려 다르출라에 도착했고, 4일째 드디어 걷기 시작이다. 다르출라는 네팔의 서쪽 끝에 있는 도시이다. 국경이고 조그만 강이 흐르는데 강 건너는 바로 인도. 이곳에서 아피 히말 트래킹이 시작되기도 한다.
걷기 시작하면서 든 생각 "여기까지 올 엄두를 낸 것만 해도 대단하다" ㅎㅎ 나는 산에 있어서는 꽤나 긍정적이다.

Ght 하이루트는 네팔 서쪽 끝 힐사에서 시작하거나 반대로 힐사가 서쪽의 종착점이 된다. 반면 컬쳐루트는 다르출라 시작. 시작점이 힐사냐 다르출라냐는 사실 별로 중요치 않다. 길은 다 연결되고 트래킹은 지도에 나온 대로만 따라가란 법은 없다. 코스는 본인의 일정과 컨디션에 따라 정하면 된다. 하이루트는 말 그대로 높은 길을 따라가는 길이고 컬쳐루트 또한 말 그대로 컬처(?)를 보면서 걷는 길이다. 중간중간 계속 마을을 지나게 되고 고도는 ‪3000-4000‬ 정도가 평균적으로 제일 높은 곳이다. (더 높은 곳도 물론 있다) Ght를 걷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하이루트를 향한다고 한다. 컬쳐루트는 아직은 개발이 덜되어 많은 이들이 선택하지 않는 길이라고 한다.



1년 전 처음 갔던 네팔이자 첫 트래킹이었던 랑탕이 너무도 좋은 2주였다. 랑탕, 고사인쿤드까지 12일간 외로이 걸었는데 매일 날씨가 좋았고, 뷰가 좋았고, 힘든 게 거의 없었다.
이번 트래킹은 그래서 좀 자만했나, 준비도 지난번보다 덜 하고 긴장도 별로 되지 않았다. 나는 전문 산악인과 함께하지 않는가? 또한 중간중간 캠핑이라 캠핑의 낭만(?)을 떠올리며 상상 속의 캠핑 생활을 그려봤다.

현실은 조금 달랐다. 첫날부터 짐에 치여 걷는 속도가 나질 않는다. 우리가 20-25일간 짠 코스는 한국에서는 거의 가본 사람을 찾을 수 없고 카트만두의 가이드나 포터들도 거의 모르는 곳이었다. 네팔의 극 서부는 트래커들에게 미지의 세계였다. 지도에도 서부지역은 FAR WEST로 표시되어 있다. 머나먼 서쪽 미지의 세계. 이곳이 네팔의 대중적인 트래킹 코스와 다른 점은 계속해서 현지의 마을을 지나간다는 점이다. 두세 시간마다 나오는 꽤나 현대적인 로지들을 지나가는 게 아니고 로지와 상관없는 현지의 진짜 마을들을 계속 지나간다. 트래커들이 아직은 거의 없기에 로지도 거의 없다. 포터 둘과 가이드도 다 이곳이 처음이라 그들도 마을이 나오면 길을 묻기 바빴다. 우리는 마을을 지날 때마다 지도를 펴고 사람들에게 길을 묻는다. 지도와 현지에서 부르는 지명이 다를 때도 있고, 지도에 나온 길이 지금은 없어진 길이기도 하고, 또 마을을 연결하는 도로들이 생긴 곳도 많고.(지도에 표시가 안된) 그래도 카트만두에서 구입해 간 지도는 꽤 정확했다. 지도와 맵스미를 합치면 얼추 방향을 잡을 수는 있었다.
암튼 걷는 재미는 있다. 멀리 설산도 보이고, 가까이 마을을 종종 지나가며, 숲길과 평지가 반복된다. 날씨는 낮엔 덥고 밤엔 춥고가 반복된다. 해발 1000 정도는 낮에 파리도 많다.
차가 다니는 길, 중간중간 도시와 만나는 길은 차를 타고 이동하기도 했다. 차가 다니는 길을 걷기란 여간 고역이 아니다. 차가 가끔씩 한대 지나갈 때마다 흙먼지가 장난 아니다. 그런 길은 그냥 차를 타고 이동하거나, 아님 찻길이 아닌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4700고개를 하나 넘었는데 글쎄 넘기 전부터 눈이 오더니 넘고 나서 눈이 펑펑 쏟아졌다. 목적지는 지도에 표시된 마을 2400 고지. 3900에서 텐트를 치고 자고 일어나니 무릎까지 눈이 왔다. 희미하던 길은 당연히 보이지 않고, 고개를 넘기 하루 전부터 터지지 않던 핸드폰은 여전히 그대로다. 어찌어찌 계속 내려가 3200 고지에서 또 텐트를 쳤다. 숲에 들어간 지 4일째 3200m 근처에서 결국 길을 잃었다. 오전 내내 내려가던 길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 주위에 연결된 희미한 길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현지 가이드도 쫄았고 포터들도 짐보다는 길을 찾는 게 먼저다.



식량은 떨어져 가고, 여전히 핸드폰은 안 터지고, 눈은 계속 내리고 우린 인적 없는 네팔 서부 히말라야 3000미터 한복판에서 길을 잃었다.
지도를 봐도 이제 길을 알 수가 없다. 무조건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한다. 한참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 우리가 놓친 길이 있는지 살폈다. 세 시간 가까이 주변을 헤매다 길스러운(?) 길을 찾았다. 지도는 계곡을 따라 계속 내려가는 길이 표시되어 있는데 우리가 새로 찾아가는 길은 능선을 따라간다. 지도와는 다른 길이다. 계곡에서 한참을 올라가서 계속 능선 부근을 따라가는데 좀처럼 내려갈 생각을 안한다. 불안하다. 그래도 길은 계속 이어진다. 그렇다면 대안이 없다. 그 길을 따라가는 수밖에.
오늘도 캠핑인가? 이 산을 벗어날 수는 있는 건가? 불안감과 피로와 함께 여러 생각들이 교차한다.
서울의 가족들도 생각난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 보고 싶다. 혹시 다행히 무사히 내려간다면 겸손하게, 착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한다.

늦은 오후. 우리는 길만보며 말없이 걷는다. 불안감과 기대를 동시에 안고. 저 멀리 길 끝에 조그만 초르텐이 보이고 초르텐을 넘어서자 꽤나 정비가 잘된 계단길 내리막이 시작됐다. 살았다! 그렇게 두 시간쯤 더 걸어 원래 가기로 했던 마을에 겨우 도착했다. 몇 가구 되지 않는 오지 중의 오지마을이다.
현지인들 말로는 지도에 표시된 길은 예전에 쓰던 길이라 지금은 없어진 길이라고 했다.

미지의 땅 FAR WEST. 멋진 이름이다. 나는 다르출라부터 라라호수까지 외국인을 만난 적이 없고, 트래커를 만난 적이 없다. 관광으로 먹고사는 나라에서 3주간 외국인을 못보다니 ㅎㅎ
사진에서만 보던 라라호수. 거길 가보자고 20일 가까이 걸었다. 20일의 걸음이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마음을 비우며 생각을 비우며 걸어온 시간들.
라라 호수에서는 오롯이 호수를 바라보며 이틀을 보냈다. 고요한 호수.
해발 3000미터에 이런 성스러운 곳이 있다니!

복잡한 머리를 비우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걷는 순간 첨엔 이것저것 생각하며 걷지만 어느덧 오롯이 한걸음 한걸음 걷기에 집중한다. 힘들어 다른 생각 할 겨를이 없다. ㅎㅎ 그렇게 머리를 텅 비우고 나면 다시 활력이 찾아온다. 지나간 일들을 반성도 한다.
비워야 채울 수도 있다.

라라호수까지 가길 참 잘했다. 맘에 고요가 찾아왔다. 이 마음이 삶에 길게 이어지기를. 다음엔 어느 곳을 걷게 될까?

라라호수





다시 반년 후. 오늘
일상은 늘 그대로고. 늘 새로운 여행을 꿈꾼다.
비워야 다시 채울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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