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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 Feb 04. 2023

엄마의 냉동고가 따뜻한 이유

60이 되니 알겠습니다

오늘 아침 맘카페에 올라온 글 하나가 마음을 건드렸다. 한 '맘'이 칠순 엄마의 냉장고를 정리해주며 실랑이를 했단다. 수많은 맘들이 댓글을 달았고, 그 숫자만큼이나 반응이 달랐다. 


그냥 내버려두라 엄마의 냉장고다, 

나도 누가 내 냉장고 뒤지면 싫을 것 같다 게다가 잔소리라니, 

우리 엄마도 젊었을 때는 깔끔했던 분이라 마음이 너무 아프다, 

정리를 못하는 것 아니고 안 하신 것 아니냐 무기력하신 게 아닌가싶다, 

힘이 없어서 그러실 게다, 

주변에서 이거 사라 저거 사라고 부추긴 사람들이 밉다, 

농산물 사달라고 하는 사람들도 밉다, 

많이씩 파는 홈쇼핑도 밉다, 

일일이 신경쓰면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다 엄마 인생 사시게 둬라, 

나는 우리 딸이 그런다, 

나는 살짝 갖다 버린다, 

엄마 심리가 이상한 것 아니냐 병원에 모시고 가봐라...


나의 엄마가 살림을 맡아 할 때도 두 개나 되는 냉동고가 꽉 차 있었다. 안 먹는 건 정리하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살림을 잘 하지 못한다는 뜻의 지적질을 엄마는 무시로 넘겨버렸다. 바뀌는 건 없었고 어느 순간부터 냉동고의 음식들을 포기한 듯도 했다. 엄마가 살림에 대한 의욕도 없어지면서 부엌살림을 조금씩 넘겨받게 되었다. 나는 의욕적으로 냉동고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차마 마구 버릴 순 없어서 물었다. "엄마 이건 뭐지? 언제 어디서 난 거지?"


그때 깨달았다. 엄마에게는 하나같이 역사가 있는 식품들이었다. 옆동 할머니가 엄마 드시라고 일부러 만들어준 김치만두, 시골에서 누군가 올라올 때 갖다준 귀한 생선들, 아버지가 좋아해서 쟁여둔 코다리, 지난 해 떡집에서 할인하길래 잔뜩 사 둔 떡국떡, 제사떡, 옆옆동 누가 준 시루떡, 출출할 때 쪄 드시라고 며느리가 주문해준 모시송편, 봄이면 한 박스씩 만들어서 보내준 쑥개떡, 시골에서 농사지은 참깨, 들깨, 콩가루, 찹쌀가루, 들깨가루, 구하기 힘들다는 100% 메밀가루, 건너동 할머니가 직접 만든 도토리가루... 모두 작년 것이라는데 내가 보기엔 몇 년씩 묵은 것들이다. 그때는 분명 기억할 거라 생각해서 메모하지 않고 넣어두었을 게다. 냉동실 몇째칸 오른쪽 구석...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다른 식재료가 들어와 밀치고 밀려서 태생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어느날 엄마는 냉동고에서 이것저것 뒤져내 삶고 쪘다. 막내가 온다고 귀한 것을 들려보낸다는 것이다. 엄마는 쑥떡이 다섯 개면 두 개까지 꺼내 먹고 나머지 세 개는 두는 식이다. 맛있는 그것을 아껴두었다가 자식들 오면 나눠줄 생각이었다. 참깨도 들깨가루도 잘 보관해두면 나눠 먹을 수가 있다. 떡국떡도 물에 불렸다가 떡국해먹으면 맛있다, 시루떡도 가끔 생각날 때 솥에 쪄먹으면 새로 만든 것처럼 맛있단다... 며느리가 보내온 모시송편은 하루 두어개씩 꺼내 쪄먹었다. 엄마는 조금씩조금씩 꺼내 먹고 남겨둔 것을 자식들 오는 날이면 뒤져내 굽고 찌고 볶아 냈다. "전복이 다섯 알 있으니 오늘 저녁 오빠네가 오면 꺼내서 전 좀 부쳐라" 냉동고는 엄마의 곳간이다. 엄마의 따뜻한 마음이 담긴 곳간이다.


얼마전 엄마의 냉동고를 열어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곳간이 반 넘어 비어있었다. '냉털'이니 '냉파'니 열심히 '처리'하고는 왜 놀란 걸까. 이제 엄마가 나눠줄 귀한 것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 엄마가 허리시술한 뒤로는 움직이기 쉽지 않으니 사람을 만날 기회가 없고, 무거운 것을 들 수 없으니 장을 봐서 채울 수도 없다. 그러니 이제 제발 달라고 해도 줄 것이 없다 아들딸들아. 그러면서 문득 생각났다. 엄마가 살림에 의욕 없어 하던 이유가 혹시 눈치없는 아들딸들이 대놓고 싫다했던 것은 아닐까. 나를 포함해 자식들의 철없음에 뒤늦게 화가 나고 엄마가 느꼈을 외로움에 미안하고 여기까지라는 게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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