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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푸기 Dec 23. 2022

지하철 임신부 배려석… 눈치가 보이는 까닭은

임신부가 되어보니 보이는 것들…난처한 순간들도 많아


“여기 임신부 배려석인 거 안 보여요? 왜 남자인 당신이 앉아있어?”


“아니 내가 탈 때 임신부가 없어서 앉았는데 왜요?”


“그래도 자리를 비워놔야지. 얼른 일어나요.”


“거참, 내가 일어나려고 했다는데 웬 참견이요?”


“당신이 여기 앉아 있으니까 저기 임신부가 서서 가잖아. 안 보여?”


“안 그래도 일어날 건데 저리 비켜요. 짜증 나게 지랄이야.”


“엇, 이 사람 왜 사람을 쳐요? 당신 몇 살이야??”


“아니,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나 육십 넘었다. 왜 쳐다보면 어쩔 거야?”


이 이야기는 실화다.


정기검진을 위해 병원을 다녀오는 길에 지하철에서 중년의 두 남성 어르신이 치고받는 싸움을 목격했다. 임신부 배려석 때문이다.

혜화역에서 4호선 지하철을 탔을 때 60대로 보이는 남성 어르신이 ‘임신부 배려석’에 앉아 있었다.

두리번거리며 다른 자리를 찾았지만, 비어 있는 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가방 옆구리 잘 보이는 곳에 임신부 배지를 달았는데 이것 때문인지 누군가 앞에 서기가 오히려 망설여졌다.

그래서 배려석을 등진채 출입구 옆에 섰다.


등 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에어팟으로 음악을 듣고 있었지만 소리를 낮춰 들었기 때문에 바깥 소음이 그런대로 잘 들렸다.

중년의 어르신 두 명이 임신부 배려석을 두고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서로 자리에 앉으려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임신부가 아닌 중년 남성이 배려석에 앉아 있으니 뭐라고 한 것에서 시작된 일이었다.


처음엔 말로 티키타카가 이뤄졌다. 앞에 서 계신 어르신이 앉아 있는 분에게 당장 자리에서 일어날 것을 권유했는데,

그 말투가 퉁명스럽게 느꼈는지 아니면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말 한마디로 승객들의 시선을 집중받는 게 어색했는지 알 수 없으나

기분 나쁜 말투로 서로의 말을 되받아치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 서 있는 어르신이 ‘저기 임신부가 너 때문에 서서 가잖아. 안 보여?”라면서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고,

순식간의 나는 승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됐다.


“이게 무슨 일이야… 난 그냥 조용히 서서 가고 싶을 뿐인데, 아 정말 난감하네?”


급기야 앉아 있는 어르신이 서 있는 분을 밀치면서 말다툼은 몸싸움으로 번졌다. 이리 밀치고, 저리 밀치면서 안경이 날아갔다.

안경까지 내동댕이 쳐지자 더 열이 받은 어르신 한 분이 멱살을 잡고 흔들어댔다.

서 있는 승객들 사이로 옥신각신하면서 밀치더니 어느 순간 내가 서 있는 곳까지 넘어왔다.


밀쳐진 몸에 내가 부딪히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싶어서 재빠르게 옆 칸으로 옮겼다. 옆 칸에서는 이미 두 어르신의 싸움을 구경하기 바빴다.

옮긴 옆 칸에서 하필 임신부 배려석 옆에 서게 됐다.

이번엔 중년 여성이 앉아 있었다. 나를 위, 아래로 훑어보더니 임신부 배지에 시선이 가는 게 느껴졌다.


“임산부예요? 여기 앉을래요?”


“아니 괜찮아요. 그냥 앉으세요.”


“아니, 앉으려면 내가 비켜주고. 서서 가다가 넘어지면 어쩌려고?”


“아니, 전 괜찮습니다.”


비켜주는 것도 아니고 안 비켜주는 것도 아닌 상황에 당장이라도 지하철에서 내리고 싶었다.

그 사이 옆 칸의 싸움을 잠잠해졌다. 아마 두 분 중 한 분이 내리지 않았나 싶다.


집에서 20분 거리인 병원에 다녀오는 길이 이렇게 길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지하철에서 내렸는데, 가슴이 벌렁거렸다.

임신부 배려석 때문에 몸싸움한 두 어르신, 그 과정에서 나에게 쏟아진 원치않은 시선들.

중년 여성의 난감한 배려.


병원만 다녀왔을 뿐인데, 집에 오니 녹초가 됐다.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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