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률 시집] 바다는 잘 있습니다.

책방 - 이병률

by 조주


오래 전하지 못한 안부를 전합니다.



날씨가 점점 쌀쌀해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는 모두일 거다.

갑자기 찾아온 추위에 많은 사람은 적응하지 못한 체

그저 그 추위를 견디기보다는 버티고 있다.


그럴수록 점점 코끝이 시려지고

마음 한편이 너무도 차가워지는 기분을 느끼고 있다.


누군가에게 따뜻함을 느끼고 있다는 걸 모른 체

그때가 춥지 않아 추위를 모를 체 지내고 살다 보니

지금은 그 따뜻함이 없어 추위에 약해져

그냥 버티고만 있다.


'누구나 미래를 빌릴 수는 없지만

과거를 갚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 이병률 청춘의 기습 중 -


눈을 감고 떠오르는 그 사람이

너무도 그리워 버티지 못할 거 같다면

지금이라도 안부를 전해 보아라.


내가 느끼는 그 추위를 그대도 느끼고 있을지 모르니 말이다.





57_이병률시집시503_앞-600x966.jpg 이병률 시집 '바다는 잘 있습니다.'



P.10

사람


사람이 죽으면

선인장이 하나 생겨나요


그 선인장이 죽으면

사람 하나 태어나지요


원래 선인장은 널따란 이파리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것이 가시가 되었지요

찌르려는지 막으려는지

선인장은 가시를 내밀고 사람만큼을 살지요


아픈 데가 있다고 하면

그 자리에 손을 올리는 성자도 아니면서

세상 모든 가시들은 스며서 사람을 아프게 하지요


할 일이 있겠으나 할 일을 하지 못한 선인장처럼

사람은 죽어서 무엇이 될지를 생각하지요


사람은 태어나 선인장으로 살지요


실패하지 않으려 가시가 되지요


사람은 태어나 선인장으로 죽지요

그리하여 사막은 자꾸 넓어지지요




p18

이토록 투박하고 묵직한 사랑


허공을 향해 날아갔으나

착지하지 못하는 돌


벼랑 너머로 굴러 떨어졌어도

어디에도 닿지 않고 허공에 매달려 있는 돌


첨벙 소리를 내며 물로 빠졌으나

가라앉지 않고 이리저리 물살에 쓸리는


삼켰으나 넘어가지 않고

목구멍 안에 머물러 있는 돌


감정을 시작하고 있는지

마친 것인지를 모르는 것처럼


눈을 감으면 배가 고파서

더 먼 곳을 생각하고


월요일의 사람들은 어디론가 가면서도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이상해한다


멍하니 떠 있는 시소는 아무도 올라타지 않았는데

한쪽으로 기울고 있으며


계절의 겨드랑이에 돋아나던 깃털은

어느 날엔가는 자라는 것을 관두었다


발을 땅에 붙이고서는 사랑을 따라잡을 수가 없다


완벽한 사랑은 공중에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어찌 삶이 비밀이 될 수 있단 말인가




P.40

설산


돌을 깨고 있는 사나이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주 높은 설산 아래서 였다

왜 물고기 화석이 여기 있지요? 그럼 우리도 바다로부터

건져 올려진 건가요?


대답도 들을 새도 없이

그때 저기서 한 노인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물었다

노인도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럼 어디로 가는 거냐고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무심히 깨진 돌 하나를 줍더니

가던 길을 가는 노인의 뒷모습을 보는데

눈가에 압력이 팽팽 해져서였다


책장 사이 꽃 눌러놓듯이

얼마 후면 우리도 땅속에 돌 속에 눌리겠다


이렇게 모두가 아름다우니

우리도 얼마나 곧 사라질 텐가




P.44

사람이 온다


바람이 커튼을 밀어서 커튼이 집 안쪽을 차지할 때나

많은 비를 맞은 버드나무가 늘어져

길 한가운데로 쏠리듯 들어와 있을 때

사람이 있다고 느끼면서 잠시 놀라는 건

거기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낯선 곳에서 잠을 자다가

갑자기 들리는 흐르는 물소리

등짝을 훑고 지나가는 지진의 진동


밤길에서 마주치는 눈이 멀 것 같은 빛은 또 어떤가

마치 그 빛이 사람한테서 뿜어 나오는 광채 같다면

때마침 사람이 왔기 때문이다


잠시 자리를 비운 탁자 위에 이파리 하나가 떨어져 있거나

멀쩡한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져서 하늘을 올려다볼 때도

누가 왔나 하고 느끼는 건


누군가가 왔기 때문이다


팔목에 실을 묶는 사람들은

팔목에 중요한 운명의 길목이

지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겠다


인생이라는 잎들을 매단 큰 나무 한 그루를

오래 바라보는 이 저녁

내 손에 굵은 실을 매어줄 사람 하나

저 나무 뒤에서 오고 있다


실이 끊어질 듯 손목이 끊어질 듯

단단히 실을 묶어줄 사람 위해

이 저녁을 퍼다가 밥을 차려야 한다


우리는 저마다

자기 힘으로는 닫지 못하는 문이 하나씩 있는데

마침내 그 문을 닫아줄 사람이 오고 있는 것이다



p.50

청춘의 기습


그런 적 있을 것입니다

버스에서 누군가 귤 하나를 막 깠을 때

이내 사방이 가득 채워지고 마는


누군가에게라도 벅찬 아침은 있을 것입니다

열자마자 쏟아져서 마치 바닥에 부어놓은 것처럼

마음이라 부를 수 없는 것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어서 버릴 수 없습니다


무언가를 잃었다면

주머니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계산하는 밤은 고역이에요

인생의 심줄은 몇몇의 추운 새벽으로 단단해집니다


넘어야겠다는 마음은 있습니까

저절로 익어 떨어뜨려야겠다는 질문이 하나쯤은 있습니까


돌아볼 것이 있을 것입니다

자신을 부리로 쪼아서 거침없이 하늘에 내던진 새가

어쩌면 전생의 자신이었습니다


누구나 미래를 빌릴 수는 없지만

과거를 갚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p.76

소금의 중력


어떤 말은 단어가 하나인데 뜻이 여럿인 것처럼

각기 다른 뜻이 여러 개인데 달랑 단어가 한 뿐인 말처럼

종종 외국어 단어에는 다중과 다단이 배치되어 있다


하나의 말이 다른 말을 거들기 위해서는

서로의 사이가 좋아야겠지만

하나의 단어에 여러 개의 의미가 모이는 것을 선호한다

단숨에 한 번에 만들어진 그런 단어는 없을 것이기 때문


그런데 나는 오늘 소금을 받았다


냄새가 있지도 않으며 정신적이지도 않은 소금

왜 소금이냐고 묻지 않았다


소금이 세상에 가라앉고

몸에 음식에 바람에 섞이면서도

일말의 물음은 없었을 것이다


소금은 혀를 쾌락으로 채우기도 하지만

인간의 문제 또한 그 혀가 갈라놓고 마는

소금의 능력을 이제는 나도 알아갔으면 한다


이 세계

이토록 하나가 아닌 세계


소금 안에 단맛이 있어서

한 그릇의 어떤 맛도 완결을 이뤄낸다는 사실을


사람이 그토록 사이를 마칠 때도

소금 같은 짠맛이 각막에 흩뿌려진다는 사실을

아무도 누설하지 않는 세계에 살면서


왜 당신이냐고 묻지 않은 일은 잘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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