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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종규 Jun 22. 2024

[36일째][6월22일] 애플 스토어의 시니어 직원

얼마 전 이야기다. (전에 썼던 삼성 서비스센터 이야기 전이다) 6월 초였던 그날은 유난히 더웠다. 급히 회사를 나와 빨리 일을 처리하려다 보니, 긴장해서 더 그런 것도 있겠다. (다이소에 간다고 하고 나왔다) 겨우 5분 정도의 거리를 걷는데도 땀이 주룩 흘렀다.


애플 스토어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미리 점 찍어둔 아이패드 에어가 있는 자리로 갔다. 그러자 가장 근처에 서 있던 점원이 내게 말을 걸었다.


"뭐 도와드릴 거 있을까요?"


목소리 톤부터 약간 나이가 묻어나 그쪽을 봤다. 애플 스토어 유니폼을 입고 있는 시니어 직원이 서 있었다. 애플 스토어에는 다양한 외모, 인종의 직원들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시니어 직원은 정말로 처음 보았다. 평소 같으면 그의 친절한 응대를 받으며 편안하게 대화를 이어 갔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심정으로 긴장된 상태였고, 한시라도 빠르게 일을 처리해야 했다.


"네, 제가 아이패드 에어를 사려고 합니다. 미리 봐두었기 때문에 지금 보고 있는 11인치를 사려고 하고요. 색깔만 고르면 되는데, 색은 블루를 살려고 합니다. 살 수 있을까요?"


내가 생각해도 조금 날이 서 있는 화법이었다. 나는 지금 급해, 그러니 너는 빨리 나에게 해결책을 내줘.


"잠깐 보자. 일단 재고가 있는지 확인해 보겠습니다. 재고가 없을 수도 있어요. 어제도 재고가 없어서 좀 일이 있었거든요."


시니어 직원은 나의 날 선 반응에도 차분하게 응했다. 그러더니 "잠깐, 손님. 죄송하게도 블루 컬러는 현재 재고가 없다고 나옵니다. 대신 퍼플이 있는데 한 번 보시겠어요?"라면서 권유했다. 나는 원래 사려고 했던 블루 컬러가 없다는 말에 짜증이 났다. 그래도 그것을 바로 표출할 수가 없으니, 화를 잠시 가라앉히고 직원이 추천해 준 퍼플을 봤다. 생각보다 나쁘진 않았다.


"보세요. 의외로 괜찮지 않나요? 저는 퍼플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몸통을 기울여 빛을 비추면 스페이스 그레이처럼 보이고요. 다른 각도로 돌리면 또 다른 색이 나와요."


그렇게 도움이 되는 정보는 아니었지만, 물건을 파는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해 손님을 설득하려는 태도가 좋아 보였다. 직원의 이야기를 들은 후 차분하게 블루를 다시 봤다. 블루든 퍼플이든 은근한 색감이라 사실상 큰 차이가 없었다. 애플 제품은 특유의 아이덴티티이자, 가장 기본이 되는 금속 재질의 스페이스 그레이 컬러를 제외하고는, 그 외 색깔은 그저 취향 차이로 선택하는 것이다. 게다가 내 물건을 사는 것은 아니니 까다롭게 고를 필요까진 없었다.  


"네, 뭐, 나쁘지 않네요. 그러면 퍼플로 하겠습니다. 그런데 커버도 사야 될 거 같은데 커버는 어디 있죠?"


"저쪽에 있습니다."


바로 눈앞 벽면에 진열되어 있었다. 디자인에 진심인 애플답게 커버에도 다양한 색깔이 있었다. 본체 색깔을 골랐더니, 이번에는 커버 색깔을 골라야 하나. 여기서도 진심으로 고르게 된다면 한 시간은 후딱 걸릴 것이다. 이럴 때는 무조건 단순하게 가야 된다.


"너무 컬러풀한 것 보다는 그냥 단순하고 튀지 않는 색깔로 하는 게 나을 거 같아요. 흰색이랑 검정색이 무난하니 그중에서 고르는 게 좋을 테고, 이게 흰색 같은데 그냥 이걸로 하는 게 낫겠는데요."


"근데 흰색은 때가 좀 잘 타요. 그러면 티가 많이 날 텐데요."


"괜찮아요. 제가 쓸 건 아니고, 누구 선물해 줄 거라, 실용적인 물건을 좋아하는 사람이니 괜찮습니다."


알았다면서 점원은 들고 있던 진열용 아이패드 에어와 커버를 앞뒤로 겹쳐서 보여 주었다. 두 가지 색깔의 어우러짐이 보기 괜찮았다. 혼자 만족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 점원이 당황하며 말했다.


"아, 손님. 이거 다시 보니까 이 제품은 손님이 구매하시려고 하는 아이패드 에어용이 아니라, 그냥 아이패드 커버에요. 사이즈가 안 맞잖아요, 보세요. 카메라 쪽이 조금 안 맞죠. 이게 아니고 그 아래를 보시면, 이게 아이패드 에어와 사이즈가 맞는 거네요. 아이패드 에어 커버는 이겁니다. 근데 아, 에어 커버는 박스만 보실 수가 있어요. 따로 진열 제품이 나와 있진 않네요."


말 그대로 박스에 그려진 그림으로만 색깔을 알 수가 있었다. 어차피 그게 그거라 빠르게 결정했다.


"괜찮습니다. 그러면 먼저 골랐던 것과 비슷한 색으로 가는 걸로 하죠. 시간이 없어서, 그냥 이것으로 하겠습니다. 제가 줄 사람한테 원래 아이패드가 있거든요, 그 사람 아이패드 커버 색하고 비슷한 거 같으니, 익숙할 겁니다."


커버까지 골랐으니 이제 계산할 일만 남았다. 나는 추가로 애플 케어도 신청했다. 1년 안에 파손되거나 분실하게 될 경우, 애플 케어를 들어 놓으면 보상을 받을 수 있다. 비싼 애플 제품을 구입할 때는 당연히 해야 하는 절차 같은 것이다. 아무리 애지중지한 물건이라도 재수가 없으면 한순간에 날아간다. 그런데 애플 케어를 안 들었다? 그만 생각하자.


"그런데 아이패드 에어를 선물까지 해주실 정도면, 값이 만만치가 않기도 한데, 되게 중요한 분인가 봐요."


시니어 직원은 구매 절차를 진행하면서도 여유로운지, 내게 질문을 했다.


"네, 여자 친구한테 선물 해 줄 건데 이번에 9년 됐거든요. 마침, 아이패드가 필요하다고 지나가면서 말하긴 해서, 그냥 이걸 골랐습니다."


"어머, 9주년이라니 축하드려요. 요즘 같은 때에 9년이나 사귀시다니."


"네, 평소에 제가 많이 받았거든요.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어휴, 그래도 정말 좋네요. 요즘에는 다들 받기를 원하잖아요. 이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는 게 되게 보기 좋으시네요."


"아, 네. 그러네요. 근데 시니어 직원이신 것 같은데 굉장히 일을 잘하시네요."


처음 물건을 사러 왔을 때의 다급함은 어느새 사라졌다. 시니어 직원이 내 말을 경청하고 차분히 응대해 줬기 때문에 금세 누그러진 것이다.


"아유, 별말씀을요. 여기 지금 단말기를 보시면 사람이 움직이는 아이콘이 보이시죠. 이게 지금 안에 있는 직원이 물건을 찾으러 다니고 있는 중이라고 하는 표시예요. 곧 물건이 올 겁니다."


잠시 후 양손에 종이종투를 잔뜩 든 애플 직원이 와서 시니어 직원에게 그중 하나를 건네고는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시니어 직원은 봉투 안을 확인 후 "고객님께서 주문하신 물건입니다."라며 내게 건넸다.


"오늘은 저한테 정말 행복한 하루가 될 거 같아요. 감사합니다!"


"아, 뭐. 제가 뭘 한 게 있다고."


활짝 웃는 시니어 직원에게 뭘 말해줘야 할지 몰라 괜히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처음 한국에 애플 스토어가 생겼을 때, 그러니까 대략 5~6년 전이었나. 그때 SNS에서 후기 글을 보면 애플 스토어 점원 특징 중에 투머치 토커나 외향적인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예를 들면 서양 드라마의 주인공들처럼 개방적인 리액션을 한다던가, 구매자의 사연을 듣고 "고객님께서 9년 된 여자 친구를 위해 아이패드 에어를 구매하셨습니다!"라며 매장 전 직원과 축하 인사를 건낸다던가.  


이 시니어 직원도 젊었을 때는 그런 외향적인 사람이 아니었을까? 애플 스토어의 시니어 직원으로 일하고 있을 정도면, 혹시 과거에 큰 기업에서 일했던 꽤 유능한 사람이었을지 모른다. 영화 '인턴'에서는 젊은 직원이 즐비한 회사에 70세 시니어 인턴으로 채용된 주인공(로버트 드 니로)이 특유의 인생 경험을 바탕으로 남다른 활약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갑자기 그 영화가 떠올랐다.


"그럼 고객님, 오늘 하루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그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양손으로 쌍 따봉을 만들었다.


"감사합니다."


애플 시니어 직원과 있었던 시간은 고작 20여 분 정도의 시간이었다. 유동 인구가 어마어마한, 그것도 2030세대와 외국인이 즐비한 홍대 입구의 애플 스토어에서 시니어 직원을 쓰고 있다? 실버 세대가 많은 일본이라면 모르겠지만, 한국 기업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역시 애플이라 다른 건가? 나도 머지않아 은퇴 후 시니어가 될 텐데 그때 무슨 일을 하게 될까? 그전까지 생각해 보지 못한 문제에 맞닥뜨린 것 같은 막막함을 느끼면서, 한편으로는 무엇이든 해내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동시에 했던, 기묘한 순간이었다.


- 200자 원고지: 24.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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