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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영서 Nov 10. 2021

허세의 가성비를 최대화하는 방법

지름의 열 두 방향 5.

허세의 가성비를 최대화하는 방법

지름의 열 두 방향. 5.


오만의 극치를 겸손이라고들 합니다. 동의가 되시는지요? 너무나 오만한 나머지 지극히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완벽하게 오만하여 본인의 것을 전혀 내세우지 않고 자신을 낮춘다고 합니다. 곤란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나 아니면 지금 1 정도 겸손해버리면 나중에 10 정도의 더 큰 복이 굴러 들어오지 않을까 얍삽한 계산기 두드릴 때가 아니고서는 겸손해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오만의 끝에서 얻는 겸손이라니 평생 요원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방탕의 극단은 절제일 것이며 자유와 방종의 끝에는 안착이라는 이름의 종착역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온갖 자극의 향연을 질리도록 즐긴 후에 누리는 안온한 지겨움은 또 얼마나 짜릿할까요. 그러나 이것 역시 제 것은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의 맥락으로 소비의 끝에는 아마도 기부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팔지 않는 것을 돈을 지불하여 대리구매하는 것이요.


소비의 형태를 유/무형으로 나눈다면 유형의 소비에서 점점 무형의 것을 소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을까요. 물건을 사다가 슬슬 여행을 가기 시작하는 것처럼 '경험'에 비용을 들이는 것이지요. 유/무형을 아우르는 그 소비의 끝판왕도 역시 기부일 것 같습니다. 이것은 유형이기도 하고 무형이기도 하며 돈을 쓴다는 생각이 들지 않다가도 아주 주체적인 소비이기도 합니다. 가격표가 붙어 있지 않는데도 저는 돈을 주고 구매할 수가 있네요. 선행이라는 것을요.

  



제가 오랜 기간 일하던 곳에는 기부, 후원이 있었습니다. 본관 입구 현판에 기업의 이름이나 기부자의 이름을 새겨두는 정도는 평범한 개인이 넘볼 수 없는 영역이라 차치하고요. 기부 금액에 따른 '기부자 예우' 제도가 있었어요. 또 그 일정 금액 이상을 기부한 고액기부자들은 본인의 등록정보 비고에 표기가 되어 있었어요. 그 기부자 예우의 영예가 부러웠고 그 멘트가 달린 분들이 존경스러웠습니다.


약 한 달 정도의 길지 않은 기간 동안 이제 다시는 급여 노동자가 되지 말아야지 다짐하면서도 구직을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생각과 행동이 모순되면 좀 힘들지요. 그때 저는 생각하기를 '내가 만약 다시 소득을 가지게 된다면 이제는 나도 기부를 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내가 사는 하루 1분 1초는 모두 운이 좋아서 숨 쉬고 사는 것이며 사소한 것 하나하나 남의 덕이 아닌 것이 없으니. 봉사활동을 하며 베풀 수 있는 따뜻한 온정은 나한테 없지만 그래도 앞으로 얻어걸리는 소득이 생긴다면 꼭 기부를 실천해야지'라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곧 3년이 다 되어갑니다.

이거 좀 많이 뿌듯하네.


한 연예인 부부가 TV에 나와 성자 같은 모습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이 50원이 있으면 그 50원만큼으로 살면 돼요 라고요. 그 부부의 삶의 방식은 기부천사로 표현되곤 했는데 그것이 꼴 보기 싫을 때가 있었습니다. 저 기부라는 소비만큼은 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지 않을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아주 약소한 금액을 기부했을 뿐인데도 TV 출연이 뭐야 온 세상의 오른손들에게 내 왼손이 한 기부를 알게 해줘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이 2년 하고 301일 째라면 내일은 2년 하고도 302일째가 되었다고 매일 카운트하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기분은 잠시이고요.


그저 매달 일정한 액수의 자동이체를 걸어두고 잊으면 됩니다. 잊고 살아도 '와. 나 기부하는 사람이야' 더 나은 사람이 된 것은 변하지 않을 것 같더라고요. 소액으로 시작해서 매년 조금씩 올려야지 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좋은 일이 있거나 어떤 성과가 있을 때도 월 후원금액을 올리기 시작했어요. 우리 아이의 고질적인 문제가 어느 날 갑자기 해결이 되었을 때나 원하던 성과가 있을 때도 금액을 올렸어요. 안 그래도 기쁜데 내가 기쁜 만큼 후원금액도 커지니 앞으로도 계속 좋은 일만 만들어야지 라며 거의 한 적이 없는 선하고 좋은 생각도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정도는 매달 자연스럽게 포기되는 금액이라 곧 익숙해지는 것이 정기 후원의 매력입니다.


그리고 정말 화가 나서 머리 뚜껑이 열릴 때 보통 시발 비용이라고 하는 소비를 하지요. 그 시발 비용으로 뭘 하나 확 사버릴까 하다가 오늘 처음 다른 곳에 후원을 넣었습니다. 내가 고액기부자는 아직 아니지만 돈 십만 원이 없지는 않으니까요.



신용카드 가능합니다. 다음 달 월급 당겨 후원하세요.


와. 화가 나서 진정이 안 될 때도 후원하세요. 카드 결제도 가능하니 다음 달 월급 당겨 후원하세요. 오늘 기분이 좋고 다음 달 월급 나올 때도 좋고 다음 달 카드값이 나갈 때도 나는 아마도 이 후원 덕에 또 기분이 좋겠지요. 


운이 좋아 이대로 인생이 흘러간다면, 그 운에 매일 감사해하면서 그래도 하나 욕심을 부려 본다면, 제가 근무했던 곳의 고액기부자가 되고 싶습니다. 여러 단계가 있었기 때문에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아요. 아니면 여러 명은 못해도 한 명을 위해 지속적인 서포트를 해보고도 싶어요.

1억이라는 돈에서 1원이 빠지면 그냥 1원 빠진 1억입니다. 현금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현금 1억 보다는 부동산이죠. 1억짜리 부동산이 있다면 1원 모자란 1억으로 그 부동산을 살 수 없죠. 그러나 어떻게든 그 부동산을 사 둔다면, 그 뒤는 더 잘 아시잖아요? 그리고 1억의 기부금은 어떤 가성비를 가진 소비가 될까요.

세상의 모든 것들의 최대화에서 황유원 시인은 기부나 소비에 대한 이미지를 최대화 시키지는 않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이만한 비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 돈에 대한 구절은 아니었지만요.  


[현실도피는 없어, 현실의 최대화만이 있을 뿐.]


소액으로 시작한 기부에서 시작하는 이 현실의 최대화, 가성비의 최대화를 함께 경험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https://www.childfund.or.kr/main.do


주사랑공동체-베이비박스 후원

http://godslove.or.kr/kor/html/main/



세상의 모든 최대화

황유원(민음사.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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