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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영서 Jun 10. 2022

난 공주고 이건 믹스다.

- 카페인 섭취 제한이 필요한 이들에게


바야흐로, 코로나 시국이 잊혔다. 코로나는 끝나거나 해결되었다기보다는 지지난해 넣어둔 김치처럼 그냥 의식에서 지워진 채 품고 살게 되었다는 것이 더 적당하겠다. 맛있는 묵지로 숙성되었을지 폭망 했을지는 뚜껑 열어보기 전에는 모를 일이며 그때까지는 마냥 잊고 살아도 좋을 것 같은 요즘이다.


코로나19가 휩쓸고 간 상흔이 거대해 보이지만 어떤 한켠의 우주에서는 아무렇지 않을 지난 3년일 수도 있다. 오늘 저녁에 먹지도 않을 3년 전 김치가 아니 글세 기깔나는 묵은지가 되었을지 쉬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사실을 알든 모르든 나의 하루에 아무런 영향이 없는 것처럼.


코로나의 영향 일리는 없겠지만 많은 것이 단체로 미쳤다. 뷰도 미쳤고 맛도 미쳤고 발색도 미쳤고 심지어 스커트 원단감도 미쳐서 펄럭거린다. 미친것이 디폴트 같은데 왜 제정신으로 살려고 돈 들여 시간 들여 약까지 먹는 염병을 하나 싶다. 그러나 뿌시고 조지고 뽀게버리는 와중에도 아름다움을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은 후지고 촌스러운 감성이 있기 마련으로, 이런 감성 역시 갑자기 튀어나온 것은 아니며 늘 그 자리에 있었을 상투적인 감성이라 특별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나도 그렇다. 전혀 특별할 일이 없다. 멀어져간 홈카페의 꿈과 텀블러가 굴러다니던 사무실도 사라지고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의 피로를 가불땡겨 풀기 위해 내키는 대로 들이켜 넘기던 카페인도 이제는 전생 같은 이야기이고. 돌고 돌아 지금 다시 여기다.

난 공주고 지금 이건 한 잔의 믹스커피지.





오후 4시 정도가 되어갈라치면 아침 출근길에 산 커피, 탕비실에서 내린 커피, 물컵, 점심 식사 후 산 아침과는 다른 종류의 커피 등 1회용과 다회용 텀블러가 기본 4개는 섞인 책상이 당연한 시간도 있었다. 당연하던 것들은 불현듯 당연하지 않아졌고 이제 다시 내 집이고 내 책상이고 규칙적인 출근이 사라진 만큼 커피를 사러 카페를 들릴 수 있는 동선도 사라졌다.


앞으로 한동안 지속될 상황의 부차적인 문제와 그에 동반된 극심한 수면 분절이 도통 해결되지 않아 수면제와 유도제도 여러 달째 조절하여 먹고 있다. 그래도 가끔씩은 에스프레소 쓰리 샷에 스팀밀크를 넣은 진한 라떼 한 잔이 간절해지기도 한다. 원래 살던 대로 대충 카페인 들이붓고 대충 자면서 살면 안 될까 싶었지만 선생님은 단호하셨다.


- 저는 워낙에도 잠을 그다지 많이 자지 않아요. 약 안먹고 안 자도 괜찮은데요?

- 그러다 번아웃 오기 십상이고요, 그냥 드시면서 좀 주무세요. 잠을 자지 않는 것이 무리가 아니라도 자지 않는 시간 동안 머릿속에서 하는 생각을 끊어냅시다.

- 아 네.. 그건 저도 그러고 싶어요.

  

이런 시절이 생기기도 하는 것이다. 꿈도 꾸지 않고 눈을 뜬 아침에 만들어 마시는 믹스 커피 한잔의 딱 한모금이 이 하루의 힘을 내는 의식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건 믹스지만 난 지금 공주고, 난 공주니까 그럼 이건 카누 왕자님이고, 난 공주인데 이제 다시 백수이고 주부가 스스로를 백수라 표현하면 기만인가. 난 주부이며 엄마이고 잠시 숨 고르는 중이라 말하기엔 잠시 고르는 그 숨이 매일같이 모자라서 깔딱깔딱 한 고개 한 고개 한 주 한 주 넘겨가고 있는 중이다. 다시 일어서 힘차게 달리기 위한 숨 고르기가 아니라 회생을 위한 산소호흡기가 필요한데 그마저도 찾기가 어렵다. 숨 고르기 할 틈도 없이 늘 스며있는 호흡곤란에 한 움큼 메마른 산소가 되어주는 것이 이 한 모금의 커피라니.  


치마의 기장감. 립스틱의 매트함까지 미쳐 날뛴다 해도 몸에 감기는 원단의 시원한 감촉과 훌륭한 음식의 미감과 처음 목 넘김의 상쾌함과 수천번 반복돼도 사랑스러울 순간을 외면하는 것이 자업자득 곧 나의 업이 된다니. 업이기를 중단한 업에 다가가려 싫은 것을 여전히 싫어하며 좋고 아름다운 것을 여전히 사랑하려 애써본다. 불행할 때 억울할까 봐 미리 행복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업이 대게 자유와 반대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중독자의 신체가 그렇듯...(중략)... 분노 이전에, 배제될 것들을 계속 베제한 채 생각하는 것 자체가 바로 자업자득이다. 그것은 생각하는 이의 사고능력을 협소하게 제한하고 생각 밖의 일들에 무능하게 만든다.( 불교를 철학하다_이진경. 2016. 한겨레출판.  p34~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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