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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영서 Mar 17. 2023

碑銘을 찾아서

京城, 쇼와 62년 지금은 서울, 레이와 5년

오래 묵은 궁금증


몇 학년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고등학생 때의 어느 하루, 문학 선생님이 이 소설에 대해 아주 길게 이야기를 늘어놓으신 적이 있다. 선생님이 수업 안하고 다른 얘기하면 재미있잖아요. 그래서 아주 열심히 들었다. 흥미로웠거든. 꼬장꼬장하고 수업도 재미없던 남자선생님이셨는데 무척 엄격하고 진지하게 한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셨다.

  절대로 역사를 가정하면 안돼. 지나간 역사를 가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런데 이 책에서는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당하지 않은 우리나라를 가정하고 있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 저격이 실패했다는 가정을 하고 있지. 이른바 역사대체물라는 것인데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지 못하고 여전히 일본의 속국인 상태야. 한국어와 글은 모두 말살되었어. 그러다 주인공은 우연히 한 비석에 쓰인 글을 보고 의문을 가지기 시작해. 이게 무슨 말일까.. 하고말이야. 이 책의 비명은 비석에 새겨진 글귀를 말하는거야.

아 비명이 Scream이 아니군요. 돌석자에 낮을 비자를 합쳐 돌기둥 즉 비석 비碑 자가 되고 쇠 금자에 이름 명, 쇠에 이름을 넣으려면 새길 수 밖에 그래서 새길 명銘 자가 되어 비명. 그 비명을 찾아가는 거군요.


이후 이 저자의 이름은 가끔 들을 일이 있었고 그 때마다 문학 선생님과 귀기울여 듣던 교실 분위기가 떠올랐으나 그래도 이 책을 읽을 일은 없었다. 사는거 바쁘잖아요. 다만 항상 궁금할 뿐이다. 그래서요 서ㆍ생님. 그 비석에 새겨져있던 글이 무슨 내용이었나요? 무슨 말이 적혀있었던 거지요? 그래서 결말은 어떻게 되나요? 그러다 갑자기 독립운동이라도 하는 그런 소설인가요? 왜 줄거리를 끝까지 말 안하셨나요? 사실 선생님도 다 안읽으신 거 아니예요?


정신을 차리기 위해 무언가 몰두할 곳이 필요한데, 다시 화실을 규칙적으로 나가는 것도 실패하고.. 이것저것 실패하여 그나마 가장 쉬운 것은 책읽기 밖에 없구나 생각하던 차였다. 지난 주 방문한 국립과천과학관의 한국SF역사관에 전시된 이 책을 보고 바로 주문했다. 크지않은 규모의 전시관에서 내가 읽어보지 않은 책은 이 책 밖에 없었다. 이제 오래되어 캐캐묵은 궁금증을 해소해보자. 1993년 5월 발행된 28쇄를 샀다.


오래된 책을 읽을 때 주의할 점


1. 어처구니를 찾지 말 것.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 이 싯구 한 줄이 주는 심상과 실제 유하 시인의 연작시 사이에 놓인 뜨악한 간극만큼 어처구니가 없을 수 있다.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서 펄럭이게 될 스커트 밑의 온갖 아름다움과 여배우 이름들이 나올 줄은 몰랐지. 해당 시인이 감독으로 참여한 영화들을 떠올리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오래 알고있긴 했으나 전문, 전권을 읽은 적이 없다면 혼자 떠올리던 품던 주관을 내려놓아야 한다. 저자의 이후 행적, 평가 등도 그냥 생각치 말아야 할 것이다.


2. 그 시대를 알아서 받아들일 것

2023년에 무진기행을 읽는다면 주인공의 나이가 30살이 아니라 50살 정도라 생각하고 읽어야 할 것이다. 수십년전의 30세를 오늘날의 30세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이 책도 마찬가지로 39세의 주인공을 50대로 정도로 생각하자.


오래된 책을 읽는 즐거움


1. 오래된 맞춤법과 표기법

풍자적 날카로움, 스위프트적인 기지와 조지 오웰적인 암울한 분위기 . 이또우 히로부미, 있읍니다. 망서리다.같은 옛스러운 표현과 이젠 쓰지않는 표현들. 빽빽한 자간과 오래된 종이냄새. 다 좋다.


2. 예상을 빗나가고

절반가량 읽다 보니 2023년 아니 레이와 5년인가. 3월이 되어있다. 승질이 뻗쳐서 읽기가 어려우나 요즘 읽어보기에 좋은 책임에는 틀림없다. 사실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재미있게 읽고 있다. 한자를 어느 정도 알고 한자의 일어음독이 된다면 이 책에서 묘사되는 경성과 반도의 모습이 더 와닿을 것 같다. 초반 도입부에 '도우자꾸마찌(銅雀町)'에 있는 '게이조우 야스꾸니 진자(京城靖國神社)' 에 신년참배하러 가는 주인공 가족의 모습을 보며 이성이 흔들리지 않을 한국인이 있을까. 필립 K. 딕의 높은성의 사내(1962)의 경우 그래도 내가 미국인은 아니기에 서술의 낙차와 미국과 일본의 전복된 역사를 그저 흥미진진하게만 읽을 수 있었지만 이 오래된 소설은 더 큰 몰입감과 짜증을 준다.  아직 궁금증이 다 해소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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