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단어 scar란 상처 혹은 상흔이란 뜻이다. 트라우마(trauma)란 말도 쓰지만 뉘앙스는 조금 다른 것 같다. 그런데 상흔이란 말은 어렵고 암울한 시대에 더욱 많이 쓰인 것 같다. 말하자면 상처받은 영혼들이 넘처날 때다. 문학사조의 한 흐름으로 소위 저항문학(resistance literature)에 속하는 소설의 제목에도 많이 쓰여젔다. 우리나라는 과거 일본의 지배를 오랫동안 받았지만 저항문학이라 할 작품이 그리 많지 못하다. 그만큼 일제의 탄압이 심했다는 예기도 되겠다. 주로 외국의 경우 프랑스, 아일랜드, 러시아, 아프리카, 중국 등에서 많은 작품이 소개되어 있다. 공교롭게도 중국의 경우는 상흔 문학 이라고도 한다니 누가 처음으로 사용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재미있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영어로 된 소설 제목이 (The Scar)인 작품이 영국에도 있고, 러시아에도 있고, 중국에도 있다.
아프리카의 대국, 나이지리아는 1960년 독립할 때까지 오랜 세월 영국의 통치하에 있었으며 훌륭한 문인들이 소위 이런 유의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다. 유명한 문인 윌레 소잉카(Wole Soyinka)도 198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1970년대 중반 나이지리아 출신 작가가 쓴 The Scar라고 동일한 이름의 감동적인 단편소설이 있었다. 아프리카에서는 어디를 가든지 얼굴이나 몸에 험상궂은 흉터를 가진 사람들을 흔히 만날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 이곳에는 아기가 태어나면 아주 어릴 때 얼굴이나 몸에 일부러 여러 모양의 성처를 내어 커서도 흉터가 아주 크고 짙게 남아 있게 하는 관습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런 관습의 유래에 대해서 부족의 표시라던가 여러 설들이 있지만 이 책에서 작가는 다른 이유를 줄거리로 다루었다. 어느 부족의 추장이 인신매매에 의하여 자식들이 노예로 다른 나라에 끌려가는 것을 막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모든 부족민들에게 지시하여 아이들이 징용되기 전 어린 나이에 훙터를 내도록 했다는 얘기이다. 우리나라의 일제시대 징용 문제를 연상케 한다.
예수님의 상흔에야 비할 수 없겠지만 보통사람들의 인생사에도 너무나 가혹한 상흔들이 있어 왔다. 예수님의 상흔은 이제 너무나 오래되어서 없어졌다는 사람도 있지만. 인간의 역사 속에는 많은 상흔들이 쌓여있으며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수도 있겠다. 우리는 늘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타인으로부터 상처를 받기도 하며 살아간다. 상처는 곪아 터져야 낫는다는 말이 있지만 상흔은 오래오래 남는다. 그런데 요즘 우리 주변에는 타인에게 너무 쉽게 상처를 주는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네 정치도 그렇고, 일제 위안부 문제도 그렇고, 탈북자 문제도 그렇고. 우리들에게 암울한 시대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