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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리 Feb 27. 2024

삶이 막막할 때 펼쳐보면 좋을 것


빈속에 카페라테를 한 모금 마실 때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따뜻한 느낌, 아시죠? 날카로운 아메리카노보다 부드러운 라테의 손길이 더 위로가 되는 건 왠지 저만의 느낌일까요. 


월요일 아침, 커서가 깜빡이는 흰 백지만큼 삶이 막막하게 느껴질 때, 이 라테도 없었으면 얼마나 서운했을까요. 그런 날에는 시원함을 넘어 조금 추운 느낌이 드는 에어컨 바람도 약간 얄미워요. 괜히 반바지를 입고 온 나도 싫고요.


카페 창밖으로 쪼그만 갓난아기가 엄마 품에 안겨 지나가네요. 저 아기도 저처럼 삶이 막막할까요? 다음 분유는 도대체 언제 먹을 수 있을까? 이 축축한 기저귀는 언제 갈아주나? 이런 것들이 막막할까요? 아니, 아기는 어쩌면 자기가 무엇을 먹는지도 모르겠지요. 그저 내 고개 하나만 똑바로 쳐들면 되는 그런 시절이니까요. 


아기는 몰랐겠죠. 자기가 말레이시아라는 나라, 조호바루라는 도시에서 태어날지 말이에요. 어떤 언어를 말하게 될지, 엄마 아빠는 어떤 사람일지도 그렇고요. 배우고 알아가야 할 게 얼마나 많을까요. 그래서 어른들은 아기들에게 많은 걸 바라지 않나 봅니다. 그저 고개만 치켜들어도 열렬히 칭찬하고 응원해 줄 뿐. 그렇게 주사위 던져지듯 태어나 살아가는 게 결국 우리 삶이겠지요. 


블루 마블. 아니, ‘부루마블’이라는 보드게임 혹시 해보셨나요? 땅을 사서 건물을 짓고 돈을 벌고 또 잃는, 어릴 적 친척 집에 가면 모든 사촌들이 함께 하던 그 게임. 주사위를 던지니 5가 나왔네요. 다섯 칸을 가면 무엇이 있을까요? 싱가포르를 사서 빌딩을 지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호텔이 세 개나 지어진 땅을 지나며 통행료를 내야 할까요? 황금 열쇠가 나왔다고요? 어이쿠, 장기 자랑으로 돈을 받을 수도 있지만 반액 대매출로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비싼 것을 반값에 되팔아야 할지도 몰라요.  


땅을 사는 것도 파는 것도 모두 주사위의 숫자에 달렸죠. 그리고 그 숫자에 나는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고요. 생각해 보면 그게 인생 같아요. 


인생의 많은 측면이 내 선택의 결과처럼 보이지만 사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주사위를 던지는 방법 정도가 아닐까요. 힘차게 높이 던질지 가볍게 깔듯이 던질지. 좌르륵 굴릴지 똑 떨어뜨릴지. 어떻게 던져도 어떤 숫자가 나올지는 전적으로 우연에 달린 일. 갑자기 식도에 구멍이 날지 차가 뒤집힐지, 새로 만난 인연이 나에게 무엇을 전해주고 무엇을 빼앗아갈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갑자기 어떤 일이 생길지, 큰돈이 손에 들어올지 갑자기 훅 사라질지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잖아요. 


우연히 태어나 고개만 들어도 칭찬받다가, 칭찬해 주는 사람은 점점 줄고 책임져야 할 건 점점 느는 게 어른이 되는 과정 같아요. 모든 우연에 대처해 주던 부모로부터 조금씩 독립해 가면서요.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른이 되었으니 우연히 몰아치는 삶을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하는데, 유난히 그게 더 막막한 날이 있지요. 무해한 마음으로 주사위를 던졌을 뿐인데 삶이 나를 무인도에 가둬 버리는 그런 날들이요. 원하지 않았지만 내 것이 되어 버린 것들. 간절히 원하지만 주어지지 않는 것들. 그런 내 삶을 부정하고 싶고, 내 삶을 갈아입고 싶고, 어쩌면 아주 조금만이라도 되돌리고 싶은 그런 때 가요.


하지만 어째요. 무인도에서 세 바퀴 쉬면서 나갈 때까지 기다려야죠. 파도가 잠잠해져 헤엄쳐 나갈 수 있을 때까지, 혹은 헬리콥터가 와서 구해줄 때까지 기다릴 밖에요. 뭘 하면서 기다릴까요?


누군가는 그 막막함을 잊기 위해 재밌는 일을 벌이거나 여행을 떠나거나 친구들을 불러내겠지요. 아니면 또 누군가는 고요히 혼자 앉아 그 막막함에 숨을 불어넣어 풍선처럼 부풀릴지도 몰라요. 그러다 그 무거운 풍선에 깔려 숨쉬기 힘들어지는 줄도 모르고.


그럴 때 저는 그냥 뚜벅뚜벅 계단을 내려와요. 내 삶의 무대에서 내려와 어두운 관객석에 앉아요. 라테를 홀짝이는 관객이 되어요. 음료 반입 가능! 상상 속 극장이니 뭔들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목구멍으로 내려가는 따끈한 라테의 맛을 느끼며 무대를 바라봐요.


그렇게 내 삶을 지켜보는 건 시끌벅적한 주말을 보내고 난 월요일 아침이 가장 어울려요. 재즈가 흐르는 카페에 앉아 따뜻한 라테를 손에 쥐면 나는 시커먼 극장에 혼자 앉아 있는 관객이 됩니다. 빛과 어둠의 공존. 무대는 환하고 객석은 어두워요. 카페 창밖은 환하고 실내는 어두워요. 그렇게 어두운 채 잠시 홀로 막막해해요. 내가 던진 주사위가 나를 이끈 곳에 서서, 혹은 주저앉아서요. 잠시 멈춤. 이럴 땐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한다는 게 감사해요. 밀린 일은 나중의 내가 다시 무대로 올라가 해내겠지요. 


할 수 있다면 고속버스를 타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한 네 시간쯤 달리고 싶어요. 낯선 도시에 도착해 국밥을 한 그릇 먹고, 바다가 있다면 바닷가를 걸으며 머리를 다 엉클어트리고, 모르는 길을 조금 더 걷다가 공원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어둑해지면 다시 국밥 한 그릇을 더 먹고 밤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술은 마시지 않을래요. 지금은 술로 잊기보다 이 막막함을 똑바로 바라볼 시간이거든요. 


서울로 대학을 가서 주말에 고향 집에 가려면, 고속버스를 타고 네 시간을 달려야 했어요. 나를 작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꿈꾸게 만들었던 서울에서 빠져나와, 가고 싶지만 또 가기 싫은 고향집으로 돌아가는 그 ‘사이의 시간.’ 그 사이의 시간에 저는 갓 어른이 되어 알게 된 삶의 막막함을 천천히 소화시켰던 것 같아요. 어쩌면 지금 필요한 것도 그 ‘사이의 시간’인지 모르겠네요. 여러분에게도 있나요, 그 ‘사이의 시간’이. 여러분은 언제 필요한가요, 그 ‘사이의 시간’이.


아, 그런데 결국은 수다였을까요. 카페에 앉아 글로 수다를 떨고 나니 그 ‘사이’를 무사히 건너온 느낌이에요. 익숙한 카페의 늘 같은 자리에 앉아, 늘 마시는 커피를 마시며, 멍하니 창밖의 사람들을 구경하며, 그리고 지난주와 달라진 케이크 컬렉션을 보며 (저번 주부터 계속 케이크 이야기를 하다니! 저는 케이크를 또 글로 먹고 있답니다. ㅋ) 어쩌면 저는 잠시 버스 여행을 하고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덕분에 막막함을 조금 털어버렸는지도 모르겠고요.


다시 돌아올 계절이 무엇인지는 알지만 오늘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이 인생이지요. 그 예측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동시에 흩뿌리며 오늘이라는 삶이 또 한 칸 지나갑니다. 오직 우연의 힘으로.


내일의 주사위는 여섯 칸씩 두 번, 열두 칸이나 성큼성큼 나를 끌고 갈 수도 있지만, 모레의 주사위는 나를 무인도에 집어넣을지도 모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칸씩, 가끔은 막막해하며 살아갈 수밖에요. 


앗, 화창하던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오네요. “인생은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가진다.” 신일숙의 <아르미안의 네 딸들>에 나오는 말입니다.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음속에 밑줄을 그었던 문장일 거예요.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붓듯 예측 불가능한 삶을 오늘도 살지만, 그래서 의미가 있다니 그 콩알만 한 의미를 한 번 찾아봅시다. 아, 물론 찾지 못하는 날도 있겠지요. 그런 칸도 당연히 있어야 하고요. 


오늘 제가 던진 주사위는 ‘우산도 없는데 장대비’인가 봅니다. 내일은 ‘친구가 사준 맛있는 케이크’가 좋겠네요. 여러분이 오늘 던진 주사위는 어땠나요? 우연히 나온 숫자를 따라 콩콩콩 갔더니, 어디인가요? ‘휴교령이 더 태풍’? 아니면 ‘집 날아간다 꼼짝 마’? 아, 당장 비가 그치는 황금 열쇠도 있으면 좋겠네요. 어쩔 수 없는 자연의 힘 앞에서 모두 무사할 수 있게요. 


그럼 당신의 평안을 빌며,

조호바루에서 아리.





사진: UnsplashMatt Sclarand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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