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여행노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리 Jun 05. 2023

지금 여기, 카타니아

아직도 토요일이라니 하루가 아~~주 길다. 집 떠난 지 얼마나 되었는지 그만 계산해야 하는데 멈추질 못하겠다. 현재 스코어 비행기 쪽잠으로만 버티며 서른여섯 시간. 걱정했던 것만큼 피곤하지는 않다. Thanks God.


아침 일찍 숙소에 도착해 짐을 맡기면서 등산화를 벗어던지고 쪼리를 신었다. 바로 나와 돌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 벌써 시골 청소년들에게 인종차별도 간단하게 한 번 받아주었지. 여기는 시칠리아의 항구 도시 카타니아. 구도심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 시내에는 마침 수산 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오래된 돌길, 몇 백 년씩 서 있는 건물들 사이에 코로나를 겪은 후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수산 시장이라고 생선만 있을 리는 없지. 새빨간 토마토를 1유로어치 샀더니 끝도 없이 담아준다. 걷다가 피곤해 배를 채우기 위해 앉았다. 시칠리아에서의 첫 끼는 커피와 크루아상. 배가 고파서 맛도 못 느끼고 허겁지겁 먹었다. 사실 그렇게 맛있었던 건 아니었다. 쳇. 실망. 


먹고 고개를 드니 눈앞에 초록색 약국 십자가가 보인다. 저걸 보니 또 그때 생각이 안 날 수가 없지.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루카에서 아픈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가 더 이상 못 걷겠다는 아이를 안고 약국으로 가던 길. 길도 모르는데 인적도 없는 시커먼 밤이었다. 누군가 설명해 준 길로, 약국을 향해 무거운 아이를 업고 터벅터벅 걸었다. 걸어도 걸어도 약국은 나오지 않았고 저 수풀에서 누가 와락 나타나도 이상할 것 없어 보였다. 힘이 없어 엄마 등에서 자꾸 미끄러지는 아이를 추켜올리며 하염없이 걷다가 마침내 눈앞에 보인 초록색 약국 간판. 식상한 표현이지만, 딱 구세주를 만난 느낌. 그래서 약국 십자가만 보면 그때가 떠오른다. 


혼자 떠나왔지만 추억까지 따라오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동안 지지고 볶으며 함께 쌓아온 시간이 있으니. 여기저기 흩뿌려진 추억들이 혼자여도 혼자가 아닐 거라며 불쑥불쑥 고개를 내민다. 추억들이 쌓여 온 그 시간을 거치며 가장 변한 게 있다면 바로 삶에 큰 의미는 없다는 깨달음일 것이다. 결혼도 육아도, 비장한 마음으로 36개월 아이를 데리고 떠났던 여행도, 돌이켜보면 그렇게 큰 의미는 없었던 것 같다. 반드시 의미가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의미가 1퍼센트도 없었냐 하면 그건 또 아니지만, 잠자코 생각해 보면 그다지 큰 의미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예전에는 삶의 의미를 꼭 찾아야 할 것 같아 그걸 찾아 버둥거렸지만 이제 사는 데 별 의미는 없다고, 그냥 태어났으니까 산다고 생각하는 단계에 이르렀달까.


아니, 단계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은 것 같다. 차곡차곡 올라가야 하는 건 아니다. 그 깨달음조차 누구에게는 아무 의미 없을 것이다. 긴 선으로 이어진 내 삶의 어떤 지점에 내가 서 있는 것뿐이다. 누구나 서게 되지도 않고 누구나 서야 하는 지점도 아닌, 그냥 내 인생의 한 점이다. 지난날들을 무심히 바라볼 수 있는 그냥 한 점.


내 삶은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었고 대단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예전에는 그걸 모르고 대단해지지 않으면 큰일 날 듯 버둥거렸다. 과거에, 특히 미래에 많은 부분을 저당 잡힌 삶이었다. 물론 그 시절을 거쳤기에 지금의 깨달음에 도달한 것도 맞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과거가 아예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의미가 있기도 했고 없기도 했다. 그러니 이것도 맞고 저것도 맞다.


의미 있는 삶이어야 한다는 착각에는 타인에 대한 높은 기대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의미의 지분이 줄어들면서 타인에 대한 기대와 판단도 함께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그때도 지금도 주변에 사람이 많은 건 아니지만, 그들을 보는 내 마음은 많이 바뀌었다. 마음이 넓어졌고 편해졌다. 주름을 이만큼 얻었으면 그만큼의 깨달음은 있어야지. 물론 이것 역시 타인에게는 기대하는 바는 아니다. 그저 나를 바라보는 나의 기준일 뿐. 


이런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들면 아름다운 건물들이 푸른 하늘을 머리에 얹고 웅장하게 서 있었다. 과거를 겹겹이 입고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나는 또 어떻게 변할지 모르지만, 큰일이 벌어지지 않는 한 이 건물들은 미래에도 그대로일 것이다. 너무 아름다워 걸으며 사진을 찍다가 포기했다. 한 발자국에 한 장씩 찍을 수는 없잖나. 내가 여기 이 아름다운 곳에 있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이지만 엄연한 현실. 신나는 현실. 


자꾸 혼자 여행이라고 하는데 몇 시간 후면 저 멀리 이탈리아 북쪽 끝에 사는 친구가 온다. 30년 지기와 처음으로 긴 여행을 함께 할 것이다. 친구가 오면 무엇을 먹으러 갈까 행복한 고민을 시작하자. 지금 이 순간 잘 먹고 잘 노는 것이 장땡이므로. 틱낫한 스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정한 집은 바로 지금, 여기다. 진정한 집은 시간과 공간, 국적과 인종에 구애받지 않는다. 당신의 진정한 집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느끼고 살아내는 매 순간이다. 의식하고 집중하면 지금 이 순간 안에 몸과 마음이 온전히 이완될 것이다. 그곳이 바로 당신의 진정한 집이다.’ 


그러니 몸과 마음의 온전한 이완을 위해 와인도 실컷 마셔야겠다. 시칠리아 가면 마시려고 와인을 꾹 참은 지 어언 한 달이었으니. 친구야, 어서 와라. 지금 이 순간에 푹 한 번 빠져보자. 

매거진의 이전글 그 가족의 여행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