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리 Aug 15. 2023

말레이시아에서 운전하다가 경찰을 만나면

어떻게 될까요

김치를 사러 동네 마트에 다녀오는 길이었어요. 아, 동네에 있는 마트가 아니라 마트 이름이 동네 마트예요. Dong Nae Korean Mart. 그런데 오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초행길로 오게 되었어요. 네비 청년이 다 알려주긴 하지만 그래도 처음이니 긴장한 채 열심히 달렸죠. 


그때 네비 청년이 유턴을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게 조금 복잡한데, 중앙선으로 붙어 유턴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로 바깥쪽으로 빠져 약간 지하스러운 유턴 전용 도로로 방향을 바꿔 다시 메인 도로로 합류하는 식이었습니다. 오직 유턴만을 위한 길이었기 때문에 중간에 빠질 수도 없고, 지상보다 약간 아래쪽으로 난 길이었기 때문에 주변도 잘 보이지 않는 곳이었어요. 네비 청년의 말대로 유턴을 하고 있는데, 글쎄 코너를 돌자마자 경찰들이 쫙 깔려 있는 게 아니겠어요? 아까 말했듯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갈 수 없는 곳이었고, 그건 그렇다면 그들이 아주 작정했다는 뜻이었죠.


해외 생활에서 경찰은 가능하면 만나지 않는 것이 좋아요. 도로에서 불심검문으로 안전을 위협하는 운전자들의 행동을 교정하는 것이야 경찰의 신성한 임무이니 시민이라면 응당 따라야겠지요. 잠시 머무는 외국인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그곳의 경찰들은 규정을 위반한 차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곳을 통과하는 모든 차를 세우고 있었어요. 대낮이었으니 음주 측정일 리도 없고요. 앗, 그런데 하필 오늘 국제운전면허증이 차에 없군요. 여권도 안 들고 다니는데. 그렇다면 오늘은 말레이시아 생활 7년 만에 가장 운 없는 하루가 될 것인가요? 


경찰의 신호에 따라 차를 천천히 멈추며 한 손으로 후다닥 가방을 뒤져 지갑을 꺼냈습니다. 하필 오늘따라 두둑이 들어있던 50링깃짜리 지폐를 허겁지겁 꺼내 운전석 옆의 콘솔 박스에 던져 넣었습니다. 5링깃 10링깃 20링깃짜리 지폐만 지갑에 남겨두고요. 사이드미러로 보니 경찰이 느릿느릿 다가옵니다. 창문을 열었죠. 면허증을 달라고 합니다. 


“미안한데 지금 면허증이 없어요. 여권도 없어요. 혹시 이걸로 안 될까요?”


불쌍하게 물으며 휴대전화에 저장된 여권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노노. 안돼.”


그리고 그가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너 운전 중에 핸드폰 해서 잡은 거야. 두 손 모두 운전대에 있어야 하는데 한 손만 있더라.”


“리얼리? 내가 정말?” (아니, 나는 얌전히 팟캐스트를 듣고 있었거든? 분명히 손에 안 들고 있었거든!)


따지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세상 물정 모르는 척 ‘리얼리?’만 남발하며 경찰 아저씨와 어색한 눈빛을 잠시 교환했습니다. 그러자 성질 급한 그가 본론으로 바로 들어갑니다. 


Do you want to deal it here or at the court? 여기서 해결할래 법원에서 해결할래?


Here or where? 여기 아님 어디라고?


Court 법원! (법원? 경찰서도 아니고 나를 법원으로 데려간다고?)


헐, 이럴 땐 우선 시간을 끌어야 합니다. 왜냐고요?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그냥 우선 끌 수 있는 시간을 최대한 끌어봅니다. 그리고 시간을 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남편 찬스입니다.


말레이시아는 남편이 집안의 가장이며 모든 결정권은 남편에게 있다는 생각이 여전히 아주 확고한 편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운전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니 여자 운전자들끼리 접촉 사고가 났다고 해 봅시다. 두 여성 운전자는 아무 결정권이 없습니다. 혹은 그런 척 행동합니다. 무슨 결정도 남편에게 전화해 묻거나 허락을 구합니다. 실제로 그렇거나 그게 아니라면 협상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남편 찬스를 쓰면서 머리 굴릴 시간을 버는 거죠. 가게에서 물건값을 깎을 때도 ‘이 가격에 사 가면 나 남편한테 쫓겨나!’라고 외치면 주인도 허허 웃으며 조금 더 깎아줍니다. 누구랑 어떤 일에 휘말려도, ‘우리 남편이 안 된대.’ ‘나 이러면 우리 남편한테 혼나.’라고 남편 카드를 내밀면 상대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 줍니다. 그래서 저도 난감한 표정으로 경찰에게 말했습니다.


Can I call my husband? 남편한테 전화 좀 해도 돼?


Ok, no problem. 응, 어서 해.


하지만 시간을 끌어봤자 달라질 건 없을 겁니다. 시간이 있거나 없거나 지금 그 자리에서 무사히 벗어날 수 없는 방법은 없거든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들이 원하는 건 확실합니다. 돈. 머니. 큰돈이든 작은 돈이든, 어쨌든 남의 돈. 꽁돈. 권력으로 너무 쉽게 갈취할 수 있는 그런 돈.


예전에 살던 인도네시아에서도, 지금 사는 말레이시아에서도 민족의 큰 명절이 다가오면 경찰들이 부지런해지는 편입니다. 국가에서 명절 상여금을 지급하지 않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원하는 만큼 주지 않는 걸까요? 아니면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 꼭 그때 생기는 걸까요? 어쨌든 무수한 이유로 그냥 어디론가 가고 있는 것뿐인 선량한 시민들에게, 특히 외국인들에게 많은 경찰관들이 셀프로 징수합니다. 무엇을? 자신의 용돈을? 아픈 가족의 병원비를? 혹은 쇼핑 머니를? 뭐가 될지는 Who knows? 누가 알겠습니까.


자, 그렇다면 그들은 과연 얼마에 나를 보내줄까요? 말레이시아의 화폐 단위는 링깃입니다. 1링깃은 300원 정도에서 오르락내리락합니다. 제 지갑에 있던 50링깃짜리 지폐는 그러니까 한 장에 만 오천 원 정도입니다. 동남아에서는 이럴 경우를 대비해 차 안에 현금이 조금밖에 없는 지갑을 따로 준비해 놓으라는 조언도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지갑을 탈탈 털어 보이면서 이것밖에 없으니 이것만 받고 보내달라고 사정하면 먹힐 수도 있다는 거지요. 하지만 저는 비상 지갑 같은 거 준비해 놓지 않았기에 재빨리 지갑 안의 지폐를 탈탈 털어 숨겼던 거고요. 혹시 ‘지갑 열어봐. 있는 거 다 내놓아.’라고 할지도 모르니까요.


어쨌든 남편이 50링깃 주고 빨리 오라고 했으니 콘솔 박스를 슬쩍 열어 50링깃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반으로 접었습니다. 잠시 다른 차들을 단속하러 갔던 경찰이 다시 다가옵니다. 유리창을 쓱 내리고 반으로 접은 50링깃 지폐를 그에게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정색을 하며 말합니다. 


“No, you can not show the money like that. 아니, 그렇게 돈이 보이게 주면 안 되지. You give me the money under the card or something so no one can not see. 카드 밑에 숨겨서 아무도 못 보게 줘야지.”


아니, 그러니 제가 이 말이 나옵니까 안 나옵니까! What the f***! 그 순간 어처구니가 아주 멀리 가출을 했지만 어쨌든 그의 말대로 얼른 돈을 회수한 다음, 옆에 굴러다니던 종이 쪼가리 밑에 돈을 숨겨 다시 건넸습니다. 그러자 그가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말합니다. 


땡큐.


그리고 그때부터 그의 한국말 뽐내기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가 봅니다. 그리고 또 덧붙입니다. ‘사랑해요.’ 유창하게 사랑한다고 말하더니 저한테 묻습니다. ‘이건 무슨 뜻이야?’

아, 몰라! 지금 대답해 줄 마음 아니거든!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얼른 집에 가려는데 그가 끈질기게 무슨 뜻이냐고 묻습니다. 다 알면서 놀리는 게 분명합니다!


하는 수없이 ‘아이 러브 유!’라고 신경질적으로 대답하고 쌩 출발했습니다. 속도가 부우웅 오르며 메인 도로로 접어드는데 속에서 뭐가 부글부글 끓어오릅니다.


나는 지금 50링깃을 빼앗기고 그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이런 젠장!!!


속에서 제가 아는 모든 욕이 서로 먼저 나오려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이런 나쁜 놈들. 능글맞은 놈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그들과 한참은 더 여기서 살아야 하니 제가 져 주는 수밖에요. 외국인인 제가, 아쉬운 제가 말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그들의 비리에 협조하면 어쩌냐고요? 협조하지 않으면 어쩌겠어요. 이 사람이 부당하게 나의 돈을 갈취했다고 경찰서에 가겠습니까, 법원에 가겠습니까. 팔은 안으로 굽을 텐데, 나의 시간과 에너지만 아깝겠죠. 따졌다가 이 나라에서 쫓겨나 버리면 또 어떡합니까. 그들의 권력은 가끔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곳에도 쓰일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이럴 때는 그냥 마음 편하게 타국에 살면서 지불해야 하는 인생 수업료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내가 이렇게 가까이서 너희의 문화에 대해, 규범에 대해, 너희의 그 못된 짓에 대해 샅샅이 알아가고 배우고 있으니 기꺼이 수업료를 내리라, 생각하면 편합니다. 겨우 탄탄하게 쌓아놓은 이곳에서의 삶이 흔들리지 않게 군말 없이 50링깃을 꺼내 바칩니다.  


세상에는 이것 말고도 신경 쓸 것이 많으니까요. 정의 실현보다 어서 집에 가서 참치 넣고 보글보글 김치찌개나 끓여 먹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정하고 배부른 시간을 더 나누고 싶습니다. 그 사건을 정의롭게 해결하고자 애쓰는 동안 나의 가족과 친구들이 피폐해진다면 나는 누구를 위해 그러고 있는 걸까요. 만 오천 원으로 3분 만에 상황을 종료하고 내게 주어진 시간을 조금 더 다정한 사람이 되는 데 쓰자고 생각합니다. 


그럼, 여러분. 늘 안전 운전, 늘 운 좋은 운전하시길요!




사진: UnsplashMadrosah Sunnah

매거진의 이전글 일 년 내내 여름이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