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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도 Apr 07. 2019

임신이 유세인 줄 알아

임신은 눈치가 보이는 일이다. 팀원이 한 명인 상황에서는 더더욱. 

부장은 막 외근 두 건을 다녀온 내게 말했다. 

"피곤하죠? 하루종일 걸어다녀 피곤하죠?"


이 질문에는 답이 정해져 있다. 차라리 묻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회의시간에 임신 초기라 그런지 입덧이 있다고 했을 때, 그의 반응은 이랬다. 


“이건 고도 씨가 선택한 거예요. 내가 그러라고 그런 것도 아니고요. 

이렇게 갑작스럽게 계획 없이 임신하게 된 것은 남편 될 사람이 잘못했네요.

피임을 했어야죠. 요즘엔 사후피임약도 잘 되어 있지 않아요?...

결혼도 안 했는데 이렇게 무턱대고 임신이라니 피임을 잘 했어야죠.”


아이를 가진 상황에 피임이라는 단어를 꺼낸 부장은 

상대의 인생까지 어찌해보려는, 오지랖이 과하게 넓은 것일까. 


“한동안 내가 고도 씨에게 조금 싸늘하게 대했던 것도,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마음에 그랬던 거예요...” 


감정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부장은 알고 있었다. 내가 임신한 걸 알면서 그래서 더 싸늘하게 행동했다. 

가끔씩 쾅쾅 서랍을 닫고 종이를 쫙쫙 찢어내는 소리를 참아야 했다. 

일부러 쿵 소리를 내며 갑자기 놀래키는 부장 곁의 사물이 부딪는 소리 때문에 나는 가끔 화들짝,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왜 저런 소리를 이렇게 티가 나게 내는 걸까. 

그리고 왜 갑자기 내가 웃으며 인사를 해도 모르는 척 쌩하게 지나쳐버리는 걸까. 


어쨌든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그가 나즈막이 고백해온 “싸늘하게 대해서 미안해요”라는 말에 어떤 의미도 감정도 해석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 속내를 유추했던 적이 있다. 

이제껏 내게 잡무며 중요한 업무며 모두 미뤄 왔던 일을 자기가 처리해야 하는 부담감, 그것 때문이었을까. 


어쨌든, 나는 아이를 낳아 잘 키워보려는 결심을 했고, 

이 계기를 맞이하여 새로운 시작을 해볼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부장은 그 이후에도 한참을 나를 대할 때 싸늘했다. 누구도 자신의 행동에 대해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그 이유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 스스로에 대한 자기합리화를 하며 나를 대했다. 


“임신해도 안 봐줘요, 백 프로의 일을 해요.” 


“고도 씨, 왜 임신을 한 거예요. 미리 공유라도 했어야죠.” 


“임신이 유세인 줄 알아.” 



이런 말을 왜 습관적으로, 내 앞에서 하는 것일까. 나는 한동안 머릿속이 복잡하고 가슴이 쓰렸다. 둘이 있는 회의실에서 그는 이런 얘기를 통해 내가 이제는 업무적으로 무쓸모한 사람이라는 걸 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주 쳐내야할 일은 산더미 같았다. 


나는 임신하기 전보다 더 외근을 나가고 더 야근을 했다. 

누군가는 지나치며 몸 걱정해야지 왜 야근을 하고 있어? 했지만 물리적으로 야근하지 않고는 내일을 맞이할 수 없는 업무가 도사렸다. 그걸 쳐내지 못했을 때 부장은 나를 하루종일 못 잡아먹어 안달인 표정으로 내가 보고하는 모든 서류에 토를 달았다. 야근하지 않은 날은 더 힘든 하루가 버티고 있었다.


임신을 유지해나가고 출산까지 행하는 일이 이렇게나 어렵고 미묘한 문제가 섞여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오늘도 “피곤하죠?”라고 묻는 상사의 물음에 나는 갈팡질팡하다가 결국 몸도 마음도 피곤해져 “아닙니다. 피곤하지 않습니다.” 하고 타협을 한다.  


마음 같아서는 "왕복 5시간 분당 미팅은 다음 번에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업무 조정을 했으면 합니다, 저도 타 팀의 임산부처럼 두 시간 축소근무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나는 차악의 답을 택했다. 미소를 보이며 괜찮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야 미움이라도 받지 않을 테니까. 


분명 마음이 시키는 답을 꺼냈으면, 이 상황에서 미움받을 게 분명하지 않은가. 

얼마나 살떨리고 눈치 보이는 일인가. 

어쩌면 더 큰 어려움과 눈치와 핍박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업무공백 때문에 혹시나 내 일이 자기한테로 떠넘겨질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이 다 티가 나는데, 

그 싸늘함이 마음으로 전해지는데, 나는 최대한 웃어야 한다. 


미움이라도 받지 않기 위해 거짓 웃음 지었다. 

그 거짓 웃음 속에는 유산될 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무의식적으로 깔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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