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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도 Feb 27. 2020

젖을 먹일 때마다 나는 짐승이 된다

아가를 키우는 다행과 기적들 사이에서

습관이 하나 생겼다. 

아가가 잠들고 밀린 집안일들을 하는 도중에, 후다닥 침대로 달려가 아가가 잘 있는지 확인한다. 아가가 고르게 숨 쉬고 있는 걸 확인하고 나서 안심한다. 아가는 무사하다. 그것만큼 다행인 일도 없다. 잠깐 내가 한눈을 판 사이에 작은 아가가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 나는 자꾸 하던 일을 멈추고 아가를 들여다보게 된다.  


내가 아기였을 때 엄마 아빠도 그랬겠지? 

아가를 낳고 나서, 종종 그들의 젊은 시절을 생각한다. 작은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을 엄마 아빠의 등허리에 대해 상상한다. 그곳에는 기쁨과 약간의 고단함이 스며 있었을 것이다. 엄마는 내가 무척 순해서 먹고 자고 먹고 자고만 했다는데, 정말 그랬을까? 시간이 흐르면서 그 고단함과 수고로움이 증발했다는 걸 알고 있다.  


아가가 웃는다. 이제는 소리 내어 껄껄껄 웃기도 한다. 2개월부터는 배냇짓이 아닌 세상을 향한 외발적 웃음을 짓는다고 하는데, 오늘 나는 쫑긋거리는 아가의 입술 덕분에 하루치의 고단함을 홀홀 날려 보낼 수 있었다.  


기적 1. 어둠의 수유 

한밤중에 아가가 운다. 젖을 찾는 것이다. 나는 미등도 켜지 않고 젖가슴을 꺼내어, 아가의 코와 입 언저리에 가져다 댄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아가는 유두를 정확히 찾아내 입을 댄다. 유두와 유륜이 아가의 입천장으로 미끄러져 빨려 들어간다. 꿀꺽꿀꺽 젖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쏴아아 젖이 쏟아지는 소리마저 들린다. 밤과 새벽 사이 두세 번쯤 치러지는 비몽사몽의 어둠 속 수유는, 한 번도 실패한 일이 없다.   


기적 2. 품 

오 킬로그램의 아가는 미숙한 내게(산후 두 달도 되지 않아 뼈가 아물지 않은 내게) 온몸을 맡기고 안겨 있다. 나는 이 아가를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 아가를 안을 때마다 이런 끔찍한 생각이 든다.  

아가가 너무 작아서, 너무 소중해서, 너무 연약해서, 아가를 대하는 마음이 절박해진다. '만약에'로 시작하는 가정들에는 아가가 겪을 기쁨과 즐거움도 있지만, 위험과 불안, 두려움, 불편함이 포함되어 있다. 나는 아가가 느낄 모든 부정적 감정을 세상 밖으로 물리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나는 아가를 세게 끌어안는다. 아가는 아직 내 품에 있다. 다행이다. 너를 품에 안는 매일이 기적이다. 


기적 3. 젖 

아가가 잠투정을 하면서 팔을 버둥거리고 용을 쓴다. 쉬이 잠들지 못하는 아가가 안쓰러워 다시 품에 안는다. 아가의 코가 나의 가슴께로 온다. 아가는 폭 안겨 젖 냄새를 찾아 헤맨다. 버둥거리는 팔다리가 잠잠해지고 쌔근쌔근 잠이 든다. 내게 젖이 있어 다행이다. 젖은 때로 아가에게 밥을 주지만, 잠과 안정을 주기도 한다. 

아마, 젖 냄새가 배 속의 양수 냄새와도 같다지? 


기적 4. 한 뼘의 젖 

십 분 전까지 배고파 발버둥을 치던 아가가 젖을 물고 평온을 찾았다. 나는 아가의 밥과 물을 이 한 뼘의 젖가슴으로 충당하고 있다. 아가가 젖을 물 때, 나는 대지가 되고 비를 머금은 구름이 된다.  

아가의 입속으로 우윳빛의 젖이 쏟아진다. 마치 마른 나뭇가지 위에 소록소록 떨어지는 빗방울 같다. 나는 비다. 흙속에 숨은 작은 싹의 정수리를 후드득 간지럽히는 비다. 푸우우 숨 쉬는 고래의 이마를 촉촉이 적시는 비다.  

나는 아가의 입속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쏟아진다. 아가야, 동그랗게 동그랗게 쑥쑥 자라렴.  


기적 5. 정말 신기한 일  

심장이 두근두근하는 느낌과 젖가슴이 찌릿찌릿 쨍쨍하는 느낌이 닮았다. 오래 방치하면 싸하게 아파오는 것도 닮았다. 그렇다면 젖은 하얀 피일까?   

젖가슴이 쨍하고 아파올 때, 젖이 돈다. 어김없이 그즈음이면 배가 고프다고 아가가 운다. 아가의 울음소리를 들으면, 가슴에서 젖이 툭툭툭 떨어진다. 젖에는 귀가 있나 보다. 두세 시간 간격으로 아가의 배와 나의 젖가슴은, 떨어져 있어도 한 몸인 것처럼 동기화된다.  


기적 6. 짐승 

젖을 먹일 때마다 나는 짐승이 된다.  

나의 젖가슴, 나의 목소리, 나의 손과 발은 새끼 짐승을 키우기 적합하게 변해가고 있다. 아기가 울면 몸이 제 알아서 움직인다. ‘어어얼’ 하고 울면 배를 조물조물 만지고, ‘에에에’ 하고 울면 안아 올려 트림을 꺽 시키고, ‘응애응애’ 하고 울면 젖을 물리고, ‘오오’ 하고 울면 까꿍까꿍 놀아주고, ‘하아아’ 하고 울면 토닥토닥 잠을 재우고, ‘헤에에'하고 울면 기저귀를 간다. 두 달 전에는 미처 알아채지 못한 능력이다. 짐승적 능력.  

나는 아가의 입속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쏟아진다 (C) 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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