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귀여웠던 시절의 낡은 이야기이다.
정확한 연도는 기억이 나지 않아, 그 시절로 돌아가 세상을 다시 바라보며 나이를 어림해본다.
기억 속 내 시점에서 '새싹 문구'의 매대는 내 가슴 언저리고, 계산대는 더욱 높아 주인아주머니를 올려다보고 있다. 그렇다면 아마 1미터 50센티도 안 되던 초등학교를 갓 들어간 나이쯤일 듯하다.
때는 12월 10일일 것이다. 아빠의 생일이다. 열 살도 채 안 된 나는 기특하게도 아빠의 생일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학교 앞 문방구, '새싹 문구'를 찾아간 것이다. 그곳이 그 시절 나에겐 백화점이며, 아웃렛이었다. 리틀 애덤 스미스들이 적은 돈으로 불량 식품을 가장 많이 살 수 있는 방법을 빠르게 계산해내고, 인기 있는 문구의 재입고를 적극적으로 요청하던 자유 시장의 축소판이었다.
1미터 50센티 이하의 나는 그날따라 더욱 신중해야 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도, 친구가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무려 아빠가 좋아할 만한 생일선물을 골라야 했기 때문이다. 불량식품 코너에서는 아예 등을 지고, 가게를 천천히 돌아보기 시작했다.
계산대 바로 앞 매대는 신상과 인기 품목들이 모여있는 코너였다. 자칫 방심하면 헬로키티 보드마카 필통에 마음을 뺏겨 나를 위한 선물로 사고 싶어 질 수 있었다. 정신을 꽉 붙잡아야 했다.
그러다 신상인 듯 하지만 초등학생들에게는 그다지 인기 없어 보이는 물건을 하나 발견했다. 두 눈이 커다래졌고,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아빠의 생일 선물로 딱 맞는 물건인 것이다. 게다가 가진 돈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 분홍색, 파란색, 연두색 중에 가장 어른스러워 보이는 연두색으로 골랐다. 아마 어린이의 눈에 가장 덜 예쁜 색이라 어른의 눈에는 예쁠 것이라 생각한 듯하다. 주인아주머니에게 생일 포장까지 부탁했다. 포장지도 가장 어른스러운, 그러니까 내 눈에 가장 예쁘지 않은 것으로 부탁했다.
집으로 돌아와 책가방에 넣어두고 저녁 식사까지 기다렸다. 제 아무리 초딩이라 해도 서프라이즈 선물의 로맨틱함을 아는 법이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선물을 주고받는 장면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뒷 일에 대한 충격이 컸던 탓일까.
잠이 들기 전, 엄마는 나를 무릎에 앉혀놓고 동화책을 읽어주듯이 단어 하나하나를 늘려가며 말했다.
"주연아- 아빠가- 생일 선물이- 너-무- 맘에 드는데- 아빠 손이- 너-무- 커서- 쓸 수가- 없대"
그 뒤로는 뭐 그렇지만 잘 간직하겠다는 말들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릎에 안긴 나에게는 '쓸 수가 없다'는 말만 맴돌 뿐이었다. 완벽한 생일선물이라고 생각했는데, 맘에 들지 않는 것도 아니고 아예 쓸 수가 없다니.
생일 선물은 바로 만년필이었다. 아니, 지금 바로 떠오르는 그 만년필 말고, 어린이용 만년필. 투명한 플라스틱에 연두색으로 깜찍한 캐릭터가 그려져 있고, 짧뚱하게 생겨서 겨우 어른의 손가락만 한 만년필이었다.
당시 아빠 책상의 무겁고 반짝이는 볼펜이 내 볼펜들과는 다른 이름의 볼펜, '만년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 무거운 만년필을 두툼한 손가락으로 잡아 한글도, 한자도 곧 잘 써주던 아빠가 멋있었다.
그래서 새싹 문구에서 만년필을 만났을 때, 나는 그것을 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빠가 좋아하고, 아빠에게 필요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아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최적의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 만년필도, 나의 생각도 어린이용이었을 뿐이었다.
용돈을 받던 스무 살의 나에게 아빠가 어느 날, 매일 쓰고 다닐 수 있는 페도라를 인터넷으로 주문해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스무 살의 나에게는 지마켓이 백화점이고, 아웃렛일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 가장 어른스러워 보이는 차콜색을 골라 집으로 배송 시켜 주었었다.
그 사실을 까맣고 잊고 지내 26살이 된 어느 날, 아빠의 바꾼 카톡 프사 사진을 보고 넘기려는데 그 페도라가 눈에 띄었다. 최저가로 구매했던 지마켓 페도라가 6년째 아빠 머리 위에 멋지게 앉아있었다. 더 좋은 페도라를 사주고 싶은 미안함도, 그래도 좋은 질의 페도라를 최저가에 잘 샀다는 뿌듯함도 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만년필 사건을 만회했다는 안도감에 마음이 한층 가벼워졌다.
그때 새싹 문구에서 고심했을 나에게 이제야 위로를 좀 건넬 수 있겠다. 무엇을 사던 아빠는 기뻐하셨을 것이며, 지금은 새싹 문구보다 넓은 지마켓의 세계가 있고, 미래엔 진짜 백화점을 꼭 모셔가겠다고 약속하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