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택일이 어렵다.
둘 다 좋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산은 나무들의 소리를 들으며 숨을 고르는 맛이 있고, 바다는 햇빛에 부서지는 물결 속으로 들어가 잠시 인간임을 잊고 둥둥 떠 있는 맛이 있다.
물론 반드시 골라야 한다면 하나를 고를 수는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만 고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좋아했던 드라마 '질투의 화신'에서 '이화신'(조정석)이 '표나리'(공효진)에게 묻는다.
'고정원'(고경표)과 자신 중에 누가 더 좋냐고, 똑같이 반반 좋아하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말이다.
누가 51퍼센트를 차지하는지 묻는다.
그러자 표나리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며 나무란다.
딱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내가 뭔가를 좋아하는데, 그것보다 덜 좋아하는 것과 비교하며 꼭 승패를 가려야 할 이유는 없다.
예전에는 제멋대로 모호한 내 취향이 싫었다.
좋아하는 하나를 콕 집어서 덕후가 되는 것이 더욱 멋있어 보였다.
내 취향의 두께는 얇게 부쳐버린 파전 같았다. 얇은 파전은 뒤적거리다 보면 이리저리 찢어져버린다.
한 가지만 좋아하려고 노력한 적도 있지만, 취향은 노력한다고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무엇이 '더' 좋아 보인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기로 했다.
산과 바다 중 무엇이 '더' 좋은지를 가리는 일에는 의미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대신에 사람들의 취향에는 각자의 모양이 있는 거라 생각한다.
우리의 취향은 다 써가는 치약처럼 오목할 수도 있고, 새로 사고 딱 한 번 쓴 치약처럼 볼록할 수도 있다.
내 취향의 모양은 덩어리들이 마구 덧대져 울퉁불퉁한 모양이다.
날카롭게 모나 있는 모양과 비교하여 더 못난가?
아니다. 그냥 다르다. 그뿐이다!
사실 모호하다는 건 더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흐릿해서 어떤 형체인지 알 수 없고, 경계가 없기 때문에 어디에든 속할 수 있는 속성.
그래서 나를 소개할 때, '낯은 가리지만, 취향은 가리지 않는다'라고 말하곤 한다.
처음 만난 사람과 어색하지 않은 척할 자신은 없지만, 그 사람이 뭘 좋아하든 대화를 한 땀 한 땀 이어나갈 자신은 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과도,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과도 그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내가 미처 좋아해 보지 못했던 분야라면, 그걸 좋아하기 위한 대화를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세상은 내가 좋아했던 것, 좋아하고 있는 것, 좋아할 만한 것들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음악이든, 영화든 알고리즘에 의해 뾰족한 취향을 큐레이션 받는 시대에 나의 울퉁불퉁한 취향은 골칫거리다.
그래서 난 더욱 울퉁불퉁해지고 싶다.
'사실은 나 이런 것도 좋아하는데, 몰랐지?'라며 인공지능을 따돌리는 순간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이세돌이 '신의 한 수'를 두어 알파고를 이겼을 때, 알파고의 패배 요인은 계산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다.
알파고는 95수까지 탐색했다. 오히려 너무 깊은 탐색을 하다가 스스로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너무 깊은 숲은 사람을 그 속에 가둬버린다.
숲 속을 걷다가, 나무도 보고, 또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에 파도가 다시 그리워지는 나의 울퉁불퉁한 산만함은 바다로의 길을 알려줄 것이다.
또 모르지. 내가 처음 발견한 이상한 세계가 눈 앞에 펼쳐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