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엄마보다 할 줄 아는 게 많은 딸이 됐다.
카톡으로 사진 보내기, 음성 녹음하기, 수많은 메뉴들 속 커피 주문하기 등등.
빠르게 달려가는 세상은 엄마를 호기심 많은 어린아이로 만들어 놓았다.
그중에서 나를 가장 기분 좋게 하는 건 다름 아닌 고데기다.
내가 기억해낼 수 있는 가장 먼 날부터 지금까지 엄마의 헤어스타일은 늘 똑같은 짧은 파마머리였다.
아줌마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머리지만, 또 우리 엄만 그 머리를 꽤 잘 소화해냈다.
우리 엄만 명절 아침마다 파우치에 한 가득 담긴 롤을 내밀며 머리를 말아달라 하신다.
언제부터 그 많은 롤들이 우리 집에 오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받아 들고 자리를 잡는다.
그런데 어느 날, 내 머리만 고데기로 정성스레 머리를 하고, 엄마의 머리는 롤로 대충 슥슥 말아주던 나태함이 미안해졌다.
그래서 그날은 엄마에게 고데기로 머리를 말아주겠다 했다.
엄마는 흔쾌히 승낙했다.
"둥글게 잘 말아봐. 머리 빈 곳이 보이면 안 되니까."
스치듯 깨달았다.
엄마의 둥글둥글 컬들은 갈수록 눈에 띄는 흰 두피를 감추기 위한 막중한 책임감을 갖고 말려 있다는 것을 말이다.
스무 살 이후로는 명절 아침마다 머리를 말아줬었다.
하지만 그날따라 고데기라는 도구가 끼어들었을 뿐인데 감회가 새로웠다.
머리를 한 움큼 집고, 고데기로 크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여러 개의 타원들을 그리다 보면 여러 가지 생각들도 함께 둥글게 말려 들어왔다.
'엄마의 머리카락은 고데기가 닿으면 부서질 것 같아. 싼 미용실에서 파마와 염색을 자주 하는 탓이겠지'
'엄마 머리에 빈 곳들이 눈에 띄네.'
'엄마의 머리를 이렇게 정성스레 만진 적이 또 있었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머리는 둥글게 잘 부풀어 있었다.
엄마는 만족해했다.
안 좋은 약을 쓰는 걸 알면서도 친분 때문에 종종 가는 '인천미용실'보다 실력이 더 좋다고 하셨다.
꽤 맘에 드셨는지, 아빠에게 가서도 딸이 해줬다며 자랑하셨다.
"이거 봅서양. 막내딸이 해줜. 인천미용실보다 잘하지 않았수광?"
그리고 언제부터 이렇게 고데기를 잘했냐며 기분 좋은 의아함을 내보이셨다.
중학교 입학할 때 교복 사은품으로 준 고데기를 받으면서부터였다.
자그마치 십 년을 매일 아침마다 방에서 뜨거운 김을 내뿜으며 곱슬머리를 펴왔는데도, 엄마는 그것이 '인천미용실'보다 나은 실력이 될지 몰랐나 보다.
고데기는 인생을 함께한 동반자라는 으쓱함과 함께 이제는 내가 엄마의 머리를 해줘야 한다는 씁쓸함이 어른스럽게 몰려왔다.
어릴 적, 엄마가 머리를 묶어주지 않고 일을 나갔던 적이 있다.
두 손으로 양갈래 머리를 꽉 잡고 어린이집에 반드시 삐삐머리를 하고 가야 한다며 아빠에게 울면서 떼를 썼다.
시간이 지날수록 삐삐머리를 할 수 없다는 서러움보다 두 손으로 머리를 쥔 팔이 아픈 것이 나를 더욱 눈물 나게 했다.
그런데도 10년이 채 안 되는 인생의 최대 정신력으로 양갈래 머리를 꽉 붙들고 있었다.
왜 머리를 꼭 묶고 가야만 했을까.
왜 두 손으로 머리를 꽉 주고 버텼을까.
아무도 알 수 없다.
아빠는 딸의 머리를 묶어 본 적이 없었고, 그런 아빠에게 삐삐머리는 고난도였다.
결국 아빠는 나를 아래층 아주머니에게 겨우 데려가, 머리를 묶어달라고 '삐삐머리 동냥'을 해야 했다.
그렇게 머리숱이 많고 곱슬인 나의 머리는 늘 엄마에 의해 꽁꽁 묶였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 사진들 속 나는 아이돌 못지않게 날마다 다른 컨셉의 머리를 하고 있다.
아마 그 시절 나는 그런 엄마의 헤어 스타일링에 익숙해져, 평범한 머리는 한사코 거부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딸은 사춘기를 지나며 최신 유행 머리를 좇아가기 바빠 늘 혼자 고데기로 머리를 요리조리 해왔다.
삐삐머리도, 곱게 땋아 말아 올린 머리도 그 시절 10대의 유행이 되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그 딸은 다 커서 엄마의 머리를 말아준다.
엄마만이 해줄 수 있던 일이, 이제는 내가 엄마에게 해줘야 하는 일이 되었다.
그건 다 커버린 나에 대한 뿌듯함이면서, 내가 다 커버리자 다시 작아져버리는 엄마에 대한 서운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