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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기물개 May 02. 2023

01. ‘개’라는 존재

첫 만남에 관한 이야기

 어린 시절을 할머니 집에서 보냈던 나에게 개라는 동물은 익숙한 존재였다. 대부분의 청소년기를 개와 함께 살아왔기 때문이다. 메리라는 하얀 진돗개부터 시작해서 그 이후로도 여러 개들과 같이 살았었다. 하지만 모든 아이들이 다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 시절 함께 살던 강아지들은 모두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맡아 키웠고 나는 그저 공부에만 매달려 살았었으니까. 개라는 동물은 내겐 '한 집에 같이 사는 존재'였을 뿐이었다.

 물론 모든 강아지들과 냉랭하게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다. 아마도 중학생이었는지 고등학생이었는지 그 시절 언저리쯤부터 함께 살았던 요크셔 테리어 여니가 있었는데 그 아이는 많이 애정하며 친하게 지냈었다. 내가 바닥에 앉아 있으면 내 다리 위에 올라와서 푹 앉아 있기도 하고, 의자에 앉아 공부를 하고 있으면 근처에서 앉아 있거나 잠을 자기도 하고. 그러던 아이가 어느 날 자기랑 똑 닮은 새끼들을 낳아 때마침 겨울방학이었던 내가 눈도 뜨지 않은 새끼들을 돌보기도 했었다. 물론 여니가 가장 많이 힘썼겠지만.

 몇 년이 지나 새끼들도 꽤 자랐을 무렵 여니도 나이가 들어 배가 점점 불러오는가 하면 힘없이 내 다리 위에 올라와 풀썩 주저앉곤 했었다. 몇 년을 같이 살았으니까 나이가 꽤 들었을 터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너무나도 초라하게 죽어있는 여니의 모습을 본 순간부터 강아지라는 존재가 내게 다르게 느껴졌다. 그제야 개들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었다. 차갑게 축 늘어져있는 여니와 그 옆에서 나를 맞아주던 여니의 새끼 진순이를 본 후에야 비로소.


 진순이는 얼마 안 가 동생이 이사를 가면서 데리고 키우게 되었고, 그 이후로 두 마리의 개들이 우리 집에서 살았었다. 한 마리는 부산에서 온 프렌치불독 불닭이, 그리고 다른 한 마리는 조금 나중에 유기견보호소에서 데려온 이름 모를 강아지.

 둘 다 내가 타지에서 대학생활을 하면서 가끔씩 본가에 내려갈 때나 만나던 아이들인데도 그 둘의 눈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나랑 얼마나 봤다고 나만 보면 좋다고 꼬리 치며 반겨주던 똘망똘망한 눈빛이.

 불닭이는 내가 가끔 간식을 주곤 했었는데 그래서인지 나를 좋아해 줬다. 어쩌다 산책이라도 데리고 나갈 때면 숨이 헥헥거릴 정도로 목줄을 당기며 달려 나갈 만큼 즐거워하곤 했었다. 침을 질질 흘리면서 좋아하는 표정이 어찌나 빙구 같았던지. 그러던 녀석이 하루는 집을 나가버려서 정말 어렵게 찾아 데려왔었는데, 어느 날 내가 집에 내려갔을 때 다시 집을 나가버렸다는 할머니의 말과 함께 사라져 있었다.

 불닭이가 떠나고 개가 없이 사는 게 허전했는지 할아버지께서는 내게 유기견을 데려올 수 있는 방법을 알아봐 달라고 했다. 아마 가족 중 한 명에게 얘기를 했는데 그 과정에서 나한테 시키라고 얘기가 나온듯했다. 그래서 유기견보호소에 대해 알려줬고 그렇게 보호소에서 한 아이를 데려오게 됐더랬다.

 그 아이는 집에 내려갈 때면 반갑게 인사하는 사이였는데 어느 날 또 내려가보니 사라져 있었다. 할머니가 말씀하시길 밤새 낑낑거리더니 아침에 보니 죽어 있었다고.


 시골 사람들 혹은 옛날 사람들이 개를 키우는 방식이랄까. 인구 대부분이 노령층이었던 우리 동네에는 강아지들이 전부 대문 근처에 묶인 채로 키워졌다. 대문 근처에 누군가가 지나가면 짖어서 알리는 집 지키는 개.

 우리 집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여니처럼 몸집이 작아서 집 안에서 같이 살게 된 애들을 제외하고 진돗개 같이 덩치가 있는 아이들은 평생을 대문 근처에 묶인 채 살았었다. 불닭이도 그랬고 보호소에서 데려온 아이도 그랬다. 아직 어린아이였는데도 그렇게 살다가 가버렸다.

 하지만 난 그런 방식으로 개를 기르는 어른들을 비난할 수 없었다. 그분들은 그저 옛날 방식 그대로 개를 키워왔을 뿐이고, 책임이 있다면 현대에 이르러 과거와 달라진 반려견 문화에 적응하도록 도와주지 않은 나 같은 자녀들에게 있으니까. 그분들이 나쁜 마음으로 그러는 게 아니라 그저 개라는 동물에 대해 잘 몰라서, 그분들에겐 그렇게 묶어놓고 키우는 게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니까. 그래서 내가 처음 룽지를 키우며 공부했던 것처럼 그분들께도 이것저것 알려드리고 개라는 동물에 대해 기초적인 것들부터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드려야 했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사건들을 겪고 나니 그런 책임보단 그동안 같이 살다 세상을 떠났을 아이들에 대한 슬픔과 미안함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고, 그래서 난 '다시는 이 집에서 개를 키우는 일은 없어야 한다'라고 다짐하게 되었다.


 보호소에서 데려왔던 아이가 떠나고 집에 강아지가 없이 산지 얼마나 되었을까. 할아버지는 또! 강아지를 데려오고 싶다며 내게 알아봐 달라 부탁했고, 나는 전에 데려왔던 애가 데려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죽어버렸으니 다시는 보호소에서 입양을 받을 수 없다는 거짓말로 무마하려 했다. 그런 식으로 내가 만류한다면 더 이상 이 집에 강아지가 사는 일은 없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평생을 개를 키우며 살아온 할아버지는 '심심하다(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는 할아버지의 성격상 다른 이유가 있었을지도)'는 이유로 계속 강아지를 키우길 원했고, 결국 할머니는 그런 할아버지가 짠하다며 아는 사람에게서 새끼 강아지를 한 마리 데려오셨다. 그게 바로 룽지였다.






룽지의 첫 모습 / 몇 시간 후 친해진 모습

 꼬리는 바짝 쳐지고 배 아래로 줄이 걸려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던 아이. 그러다 내가 다가가자 무서워서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버리던 아이. 룽지의 첫인상이었다.

 '기어코 데려왔구나'하는 생각과 동시에 '이 아이만큼은 이전의 아이들처럼 살게 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집 안으로 데려와 씻기고 놀아주며 친해진 다음 배변훈련부터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과정이 너무 성급했다고 느껴지긴 하지만 당시엔 룽지를 실내견으로 살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마음이 앞서 있었다. 어쨌거나 룽지는 간식을 좋아해서 기특하게도 배변훈련에 금방 적응했고 나는 '이제 됐다'하는 안도감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이제는 집 안에서 키우시라, 내가 배변훈련도 다 해서 화장실도 잘 가린다, 밖에 묶어놓고 그러니까 애가 무서워서 잘 걷지도 못하지 이렇게 놀아주면 애가 잘만 뛰어다닌다 등등. 우여곡절을 거쳐 이 아이만큼은 집 안에서 지내며 행복하게, 편하게 살 수 있도록 어르신들을 잘 설득한 줄 알았다. 그랬는데... 룽지는 활발한 어린아이라서 많이 놀아줘야 한다는 얘기를 빼먹었던 탓에 혼자 놀던 룽지가 심심한 나머지 화분에 있던 이파리를 뜯어버리는 사달이 일어났다. 결국 룽지는 하루 만에 다시 밖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곧 이사를 가야 하는 나에겐 세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하나는 어떻게든 다시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설득해서 룽지가 집 안에서 같이 살 수 있도록 하는 것, 다른 하나는 그냥 내가 데리고 사는 것, 마지막 하나는 룽지가 어떻게 살든 아예 신경을 꺼버리는 것.

 저 작고 여린 아이가 밖에서 추위에 떨며 사는 걸 모른 척하고 살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앞으로 계속 룽지를 집 안에서 키울 거라 믿을 수도 없었다. 그러면 결국 내가 키우는 것밖에 없는데 지금껏 내가 강아지를, 그것도 뛰어다니다가 혼자 뒤뚱거리며 넘어질 정도로 어린 강아지를 혼자 책임지고 키워본 적은 없었기에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일단은 이사 가기 전까지만이라도 내가 데리고 살아야지. 추워서 벌벌 떠는 애를 밖에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까. 룽지도 실내 생활에 좀 더 적응이 된다면 나중엔 할머니 할아버지랑 같이 살 수도 있을 테니까.


 그렇게 나의 육아는 시작되었다.













무서울 땐 타조처럼 숨어버리지만 손가락 앞에서는 깡패였던 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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