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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밥 짓는 사람 Jun 10. 2022

마감 후일담

고통 속에서 벗어나 자기 치유를 위한 편집자의 글

그림책에 관한 책을 편집했다. 그림책에 대한 수많은 원고 중에서, 가장 진지해 보이고, 침착한 느낌의 원고였다. 주제와 연결된 어른 책을 다시 추천한다는 점에서도 끌렸다. 그림책으로 생각하고, 치유하고, 자신과 아이를 발견해 나가는 엄마의 이야기가 엄마 독자에게 영향을 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계약을 했고, 편집을 했고, 어제 마감했다. 


내가 절로 편집 후기랍시고,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이 원고만큼 편집하기 어려웠던 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선, 분야 선정부터 힘들었다. 좋은 부모 되는 분야의 자녀교육 분야로 넣어야 할지, 서평에 대한 그리고 인간을 탐구하는 영역의 인문 분야로 넣어야 할지 모르겠더라. 


분야 선정, 콘셉트, 제목부터 명확하게 나를 관통하는 게 없어 혼란의 연속이었다. 거기에 나를 혼란의 카오스로 빠트린 건 따로 있었다. 바로, 원고의 난문(難文). 

개념 설명이나 전문 용어가 하나도 없는 글인데도 비문의 향연으로 손볼 곳이 많았다. 문장이 출발지가 A라면, B와 C 근처에 있어야 하는데 Z까지 가버렸다. 주술관계가 맞지 않고, 문장 안에 또 다른 문장이 끼어 있는 구조가 많아서 난감했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인과관계도 없었고, 그냥 단편적 생각이 한 문단 안에 줄 지어 있었다. 


몇 달 전, 저자가 계약 이후에 샘플 원고와 완전 다른 원고를 줘서 결국 외주자를 붙여 재집필 수준의 윤문을 했던 책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 원고는 전체 원고를 보고 진행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그러니까 대충 읽으면 대강 뭔 말인지 알겠는데, 꼼꼼히 따지고 들면 하나도 맞지 않는 문장이랄까. 부족한 설명, 과잉 설명이 많았다. 

작가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 고맙게도 작가는 너그러이 내 뜻에 따른다고 했다. 뼈대만 두고 살을 계속해서 붙이고, 덜어냈다. 그래도 뼈대는 있으니 다시 재건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편집하면서 작가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림책에 관한 책을 편집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판단이 흐렸던 내 책임이었다. 오히려 작가가 주제를 하나씩 잡아 적절한 책을 소개한 능력이 뛰어나 읽으면서 감탄했고, 좋은 책을 추천해 줘서 고마웠다.  


나는 그림책을 좋아한다. 10여 년 전, 처음 일했던 출판사도 그림책이 나오는 곳이었다. 작가님까지 상주해서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 작가 관리조차 중요한 곳이었다. 그림책을 좋아했던 건 2004년부터였다. 


처음 그림책에 관심을 준 건 누군가 수업 시간에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로 작업을 해 온 걸 보고 나서였다. 교수님은 좋은 그림책이라며, 그 책으로 작업을 해 온 사람을 칭찬했다.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는 두더지 머리 위에 누가 똥을 쌌는지 똥의 주인을 찾아가는 이야기로 아이들이 좋아하는 ‘똥’이 여러 모양으로 마구 나오는 책이다. 누가 내 머리에 똥 쌌냐고 반복적 묻는 문장 구성으로 리듬감 있으면서 결국에는 문제 해결을 해 가는 방식이 신선했다. 

그 뒤로 나에게 영감을 주는 수많은 그림책을 만났다. 사노 요코의 <100만 번 산 고양이>, 데이비드 위스너 <이상한 화요일>, 지미 리아오 <지하철>, 모리스 샌닥 <깊은 밤 부엌에서> 등 어른이 보아도 좋은 그림책들을 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당시에 CJ라는 큰 기업에서 그림책 전시회를 열었는데 그 전시회에서 좀 더 깊게 그림책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세계적인 그림책 공모전인 CJ 그림책상은 2008년도 8월부터 공모를 시작하여 2009년 1월, 2009년 11월, 2010년 12월까지 3회째 진행되고 폐지되었다.      


그리고 서울국제도서전에서, 그림 작가들이 모이는 전시회, 해외 서점 등에서 빠지지 않고 그림책을 수집해 나갔다. 그러나 나의 열정은 2013년쯤에 끝이 난다. 고로 이후에 나온 그림책은 잘 모른다는 뜻... 

저자가 소개한 그림책은 대개 최근작이고, 아주 유명한 책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 몰랐던 책이라 한 권 한 권 다시 읽어가며 편집을 했다. 오랜만에 만난 그림책은 역시 내가 많은 영감을 주었다. 좋았다. 내가 그림책에 대해 애정을 가졌던 만큼,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원고에 지나치게 몰입을 한 듯하다. 


그림책 출판사에서 일반 단행본 출판사로 이직을 하고, 또 아이들을 위한 책을 만드는 곳에 가서 그림책을 몇 권 더 편집했지만 메인은 아니었다. 그리고 다시 단행본 출판사로 이직해서 만난 원고가 바로 이 원고이다. 오랜만에 접한 그림책이어서 잠시 흥분했던 걸까. 

아니면 요즘 자꾸 매출에 신경이 쓰이고, 출간 종수를 맞추기 급급하다 보니 자꾸 명확치 않은 콘셉트, 설득력 떨어지는 차례, 어설픈 카피 등 모자람이 생긴 탓일까. 확신 없이 내 손을 떠난 원고에 미안하고, 두렵고 그렇다. 그나마 하반기에 계약한 책들에는 자신감이 있으니 다행인 건가. 오늘은 넘어져도 내일은 일어날 거니?   


이제 정말 내 손을 떠났다. 책이 들어오면 오래도록 잘 돌봐주고 사랑해주고 아껴주는 일만 남았다. 부디, 다른 사람들에게도 사랑받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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