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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석훈 Jul 23. 2016

파스텔톤 동화 마을, 라박

첫 번째 마을, 라박

일정을 짜지 않고 떠나는 여행은 장단점이 뚜렷하게 존재한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숙소 사전 예약도 거의 하지 않았고, 렌터카를 예약해두었기 때문에 버스도 딱 첫 3일 치만 예약을 해두었었다. 베네치아를 떠나 다시 크로아티아 풀라에 돌아온 후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렌터카를 픽업하러 간 일이었다. 하지만 신용카드가 정지돼 헛걸음을 한 나는 대충 짜 두었던 일정이 전부 꼬여 버렸다. 즉 십삼일의 여행 중 열흘은 아무 일정 없이 어떻게든 열세 번째 날까지 최종 목적지에 도착만 하면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일정상 내 다음 목적지는 라박, 아주 작은 마을이다. 풀라에서 이곳으로 바로 가는 버스는 없고 라빈에서 환승을 해야 했는데, 렌터카만 믿고 버스 시간을 확인해 두지 않아서 라박까지 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원래 계획대로 되는 여행은 없다는 자기 위안을 하며 마음을 편하게 가지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다행히 풀라에서 라빈으로 향하는 버스가 있었다. 또 라빈에서는 라박으로 가는 마을버스가 있었다. 라빈에서 버스를 타고 15분쯤 지났을까? 라박에 도착했다.

렌트에 실패하고 쓸쓸이 걸었던 풀라의 해변, 하늘도 내 마음을 아는지 흐렸다

내가 라박에 도착한 건 오후 3시쯤이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밖에 나왔더니 날씨가 굉장히 흐렸다. 라박은 생각보다 많이 작은 마을이었다. 숙소 직원 말에 의하면 라박은 리조트 마을로, 라박에는 사는 사람은 거의 없고 대부분 라빈에서 출퇴근을 한다고 한다. 확실히 리조트 마을이라서 그런지 수영장과 해변이 정말 많았다. 라박의 해변가를 걷다 보면 금세 마을 중심가에 도착한다. 날씨가 날씨인지라 리조트에 휴양하러 온 사람들은 모두 숙소에 있는 듯했다. 하루만 머물 예정인 나는 가능한 한 빨리 많은 걸 봐야 했기 때문에 부지런히 움직였다.

날씨가 흐려서 그런지 사람들이 많이 없다

그러던 나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흐리던 날씨가 맑아지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어쩌다 이 작을 마을에서 일박을 하게 됐는지 모른다. 심지어 이 마을을 어떻게 알게 됐는지도 기억 이안 난다. 여행을 계획할 때 지도를 보면서 동선을 짤 때 왠지 모르게 라박을 꼭 넣고 싶었다. 확실히 와보니 참 잘 왔다는 생각이 든다. 날씨가 더 좋을 때 왔으면 좋았을 걸 하고 아쉬워하던 참에 차 렌트를 하지 못 해서 일정이 꼬였다는 게 생각났다. 다음날 일기예보를 보니 하루 종일 맑음이라는 걸 확인하고 과감하게 그곳에서의 일정을 하루를 더 추가하기로 했다. 아침부터 맑은라박이 꼭 보고 싶기도 했고 이렇게 떠나면 왠지 아쉬울 거 같았다.


일정이 없어지니 여유가 생기고,

일정의 노예였던 나는 자유로움을 얻었다.

여행하는 스타일은 모두 다르다. 하지만 나는 계획을 너무 디테일하게 짜는 것보다는 큰 틀에서 여유 있게 짜는걸 추천한다. 왜냐하면 내 경우처럼 여행하는 도시가 마음에 들어 더 머물고 싶어도 일정에 쫓기듯 여행하면 여유도 사라지고 가슴이 답답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행은 일정을 짜기 위해 있는 게 아니다.


맑은 하늘 아래 아드리아해는 무엇보다 아름답다

라박에서의 시간이 하루 더 늘어난 나는 여유를 즐기며 라박을 둘러보았다. 사람들도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하니 라박은 더욱더 활기를 띄었다. 파스텔톤의 색을 띄우는 집들과 유리구슬만큼 맑은 바다를 보면서 이곳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며 구경을 하니 눈에 들어오는 게 더 많았다. 관광지만 찾아가 사진을 찍고, 맛집을 찾아 음식을 먹는 전형적인 관광객을 벗어나 하고 싶은 대로, 마음이 내키는 대로 움직이며 하루를 보냈다. 확실히 여유롭게 하루를 보내다 보니 다른 날보다 덜 피곤했다.

저 파라솔 밑에 누워서 낮잠 자고 싶다

둘째 날은 첫째 날보다 더 편안하게 보냈다. 여행 중 처음으로 늦잠 아닌 늦잠도 자 보고, 아침도 오래간만에 제대로 먹고 수영복을 챙겨 입고 해변으로 나섰다. 크로아티아의 4월 말의 날씨는 생각보다 좋았다. 하지만 수영을 하기에는 무리였다. 발을 물에 담근 순간 온몸으로 느껴지는 찌릿한 느낌은 수영을 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그래도 수영복도 입고 해변까지 왔으니 수건을 깔고 해변에 누워서 낮잠을 잤다. 분명 해변으로 나왔을 때는 오후 1시였는데 눈을 뜨니 오후 4시가 거의 다 되었다.

 저녁 6시의 라박은 꿈 같다

오후 6시쯤의 라박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대이다. 해가 서서히 저갈 때 마시는 모히또 한 잔은 마치 내가 라박을 다 가진 듯 한 느낌을 들게 해준다. 오늘 하루는 이번 여행 중 가장 여유로웠다. 해변에서 3시간 동안 햇빛은 쬐면서 누워있는 여유로움은 이번 여행에서 처음 느끼는 여유였다. 매일 일정에 쫓겨 아침부터 밤까지 힘들게 돌아다녔는데 오늘 하루만은 정말 쉬는 것 같았다. 라박은 그리 유명한 여행지도 아니고, 살면서 다시 와볼 일도 없고, 그냥 지나쳐 가는 여행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 라박은 베네치아보다, 풀라보다, 자그레브보다도 더 편안하고 좋은 곳이다.

나는 이 파스텔톤의 마을을 사랑 하지 않을수 없다

이틀 사이에 라박에 고마운 사람들이 꽤나 많이 생겼다. 바에서 일하는 청년은 내가 혼자 앉아서 밥을 먹자, 내 앞에 앉아서 말동무가 되어 주었고, 사진을 부탁하면 항상 오케이라던 라박의 노부부들, 또 아침에 내가 버스를 놓치자 자기 차에 태워서 라빈까지 데려다준 리조트 직원 누나까지. 라박은 정말이지 내게 잊지 못할 기억을 선물해 주었다. Hvala 라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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