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유리정원> 리뷰
초록이 싱그러운 숲속에 유리로 된 집이 있다. 투명해서 안팎이 구별되지 않는 유리 안에 나무가 되려는 재연의 소망이 엽록체로 만든 초록색 피로 다시 태어난다. 재연은 유리 밖으로 정원을 둘러싼 울창한 나무에 올라 나무를 치유함으로써 자신을 치유한다. 안과 밖은 모두 초록과 치유라는 키워드로 연결되지만 실은 유리라는 보이지 않는 벽의 경계로 나뉜다. 유리 밖이 현실이라면 유리 안은 이상이다. 현실과 이상의 경계에서 발을 어느 쪽으로 내디뎌야 할까.
#1. 신념과 타협 사이
엽록체를 활용해 인공혈액을 만들려는 거대한 꿈을 꾸는 과학도 재연. 참신한 소재로 인간 건강의 문제를 풀어보려는 재연의 희망이 연구비와 임상시험, 시간이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힌다. 세상에서 옳은 일과 그른 일은 확연하게 구별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이라는 잣대를 그 옆에 나란히 세우고 나면 그 경계가 흐릿해진다. 실현할 수 없을 것 같은 일도 옳다고 생각하며 끝까지 밀어붙였을 때 세상에 발전이 있고 혁신이 태어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옳다는 신념을 어디까지 얼마만큼 밀어붙일 것인가. 어느 지점에서 현실과 타협해야 하는가에 관한 문제는 늘 모호하다. 현실과 타협해 재연의 연구 소재를 훔친 후배 수희는 세상의 주목을 받아 성공하고, 이상만 추구한 재연은 연구 소재를 빼앗긴 것은 물론 사랑하는 남자 정 교수까지 빼앗기며 숲속 깊은 곳으로 내몰린다.
#2. 창조와 모방 사이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처럼 인간이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소설가 지훈은 선배 소설가에게 “당신의 소설은 창작이 아니라 모방”이라고 대들며 창조과 모방의 경계를 분명히 세운다. 그랬던 그가 우연히 재연을 알게 되고, “내 몸에는 초록색 피가 흐른다”는 재연의 문장에 한순간 끌려 재연의 삶을 소설로 기록한다. 다른 사람의 삶을 모방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지훈의 소설은 창조일까, 모방일까. 재연의 연구 소재를 다른 용도로 재해석한 수희의 아이디어는 창조와 모방 사이 어디쯤 있을까. 각종 산업에서, 예술계에서, 시나리오에서, 여러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창조와 모방의 경계에서 태어난 새로운 작품이 그 경계를 둘러싼 채 우리에게 다가온다.
#3. 인간과 식물 사이
영화 <유리정원>에서 이상향으로 품고 있는 것은 나무의 삶이다. 한쪽 다리가 자라지 않는 병을 앓고 자신이 나무에서 태어났다고 굳게 믿는 재연은 나무로 회귀하려는 소망을 품는다. 재연은 인간이 나무처럼 물과 태양만으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나무는 빈자리를 찾아 서로를 피해 가지를 뻗지만, 인간은 서로에게 칼을 들이대고 남의 것을 빼앗으며 자기 자리를 찾아간다. 인간의 삶이 물과 태양만으로 유지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지 않고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인간의 빨간 피를 나무의 초록 엽록체로 대신할 수 있을까. 재연은 어른의 다리로 인간의 땅을, 자라지 않은 어린아이의 다리로 식물의 땅을 밟은 채 경계에 서 있다가 다른 사람의 욕망으로 상처를 입고 식물의 공간으로 이동한다. 나무에서 태어난 재연은 다시 나무가 되어 땅에 뿌리를 박지만, 자신을 매개로 인간과 식물을 연결하려는 재연의 시도는 결국 실패다. 신념이 타협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앞서 기다리고 있는 현실은 검고 탁할 뿐이라는 사실이 쓰라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