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인의 사랑> 리뷰
*이 글에는 영화 <시인의 사랑>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소박하고 친근한 제주의 풍경이 흘러간다. 며칠 휴가내고 들렀던 휴양지 제주와는 한결 다르다. 배에서 그물을 내리고, 마른 해초를 손질한다. 제주에 사는 사람들이 생업을 이어가는, 치열한 삶의 터전. 제주의 속살을 들추니 한 가정에 상실감이 스며든다. 서늘한 그 기운은 잔잔하고 나른하게 슬며시 찾아오다가 어느 순간 예리한 화살촉이 되어 가슴팍에 콕 박혔다. 갑자기 터지는 웃음보에 깔깔대다가 어슴푸레 깔린 서글픔에 콧등이 시큰해진다. 웃음 뒤에 서린 얼음장 같은 현실에 살갗이 따끔해지는 영화. <시인의 사랑>의 책장을 넘기다 마음이 에였다.
살아있지만 죽어있는 것
시를 잘 쓰지 못하는 시인 택기는 동료 시인들의 비평에 어깨가 움츠러든다. 아내 강순과 한 가정을 이루고 살지만 경제적으로도 잠자리에서도 가족구성원을 늘리는 문제에도 발언권이나 주도권이 없다. 그가 바라는 세상은 다른 사람들 눈에는 이상일 뿐이며,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식으로 고통을 갈구한다. 고통을 갈구하지 않는 시인의 삶은 죽어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동료 시인들은 시련을 겪지 않은 시인의 고운 시는 아름답기만 할 뿐 심오한 의미가 담겨있지 않다고 지적한다. 노처녀이던 당시에는 결혼만 하면 되겠다던 아내는 이제 여느 가족처럼 아이를 갖고 싶어졌다고 고백한다. 그 와중에 정자감소증이라는 진단을 받는 시인의 모습이 측은하다. 눈을 반짝거리며 산부인과 의사를 응시하는 아내와는 달리, 시인은 점퍼 안으로 들어가려는 듯 목을 잔뜩 웅크리고 있다.
생명수의 발견
불치병을 고친다는 생명수를 얻으면 이런 기분일까. 아내가 억지로 물려준 도넛의 단맛에 눈뜬 택기는 갑자기 기운이 샘솟은 듯 도넛 가게로 달려가고 또 달려간다. 도넛은 축구 게임보다 삶에 집중하는 힘을 실어주는 에너지 드링크이자, 시를 쓰는 자양분이다. 시인의 집이 문학적 서정성을 풍기는 정적인 공간이라면, 도넛 가게는 현실에 조금 더 가까운, 활력이 넘치는 공간이다. 시인의 손목을 잡아당긴 도넛이라는 생명수는 디딤돌이 되어 택기를 현실의 인물, 소년 세윤 앞에 바로 세운다. 생식력을 생명의 메타포로 본다면, 시인은 소년의 생명력을 발견한 순간 죽어있던 자신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소년과 함께 곶자왈의 숲길을 걷던 시인이 나무 밑동에 버려진 검은 비닐봉투를 두고 문학적 상상력을 펼치자, 소년은 현실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설정이라며 핀잔한다. 시인이 사용하던 아름다운 시어는 지극히 현실적인 소년의 비속어와 충돌하며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한다.
사랑과 사랑은 헷갈린다
시인은 중병을 앓아 누워서만 지내는 소년의 아버지를 마주한다. 시인의 돌아가신 아버지가 쓰던 욕창매트를 창고에서 꺼내 소년에게 전하는 순간, 아버지의 빈자리를 경험한 시인과 소년의 공감대가 흐릿하게 깔린다. 사랑이란 서로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것임에도, 가까운 사람의 상실로 마음속에 빈자리를 두고 있는 사람은 쉽게 그 자리를 남에게 내어주지 못한다. 시인은 끝까지 그 빈자리를 아내에게 내어주지 않았고, 소년도 조금씩 다가오는 시인에게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며 마음 둘레에 방어막을 쳤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그 빈자리가 채워지고 나면, 마음에 저릿하게 느껴지는 온기가 과연 가족으로서의 사랑인지, 연인 간의 사랑인지, 주변 사람에게 느끼는 연민인지 알기 어렵다. 365일 누워 지내며 살아있지만 죽어있는 것이나 다름없던 소년의 아버지는 시인이 처한 상황과도 일맥상통한다. 어쩌면 시인은 그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했을지도 모를 일. 소년의 아버지는 세윤을 지켜주는 시인의 존재에 안도하며 숨을 거두고, 그 죽음으로 시인은 소년의 전면에 적극적으로 나타난다. 시인의 정체성이 살아나는 순간이다. 나직한 시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시인은 슬픈 사람 대신 울어주는 사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