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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맹 Aug 03. 2019

버려진 궁, 경희궁을 걸으며

사적 271호 경희궁지

 

 서울에 있는 조선 왕조의 왕궁은 몇이나 되는가? 운현궁과 경우궁 등 왕의 잠저나 왕족의 사당을 제외하고 왕이 거주했던 정식 왕궁만 따지면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창경궁, 경희궁 이렇게 다섯 궁이 존재한다. 흔히 5대 궁이라고 칭해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경희궁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언제부턴가 1박 2일 등 예능 프로 등에서 경희궁이 언급되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거의 다 경희궁을 아는 것 같다. 경희궁이 존재감이 없는 듯하여 내심 안타까웠던 나는, 이러한 변화에 기쁨을 느낀다. 그러한 마음에서 2017년 가을에 답사했던 기억을 떠올려본다.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


 경희궁 (慶熙宮). 경희라는 두 음절은 생각보다 우리에게 익숙한 말이다. 중장년의 여성의 이름으로도 많이 쓰이고, 또 동대문구에 있는 어느 대학교의 이름으로도 쓰인다. 오랜 세월 버려지고 존재감이 없던 궁궐. 결코 낯선 이름은 아니었던 것이다. 경희궁은 본래 14대 임금 선조의 서자였던 정원군의 저택이었다. 그러던 것을 '정원군의 집터에 왕기가 흐르고 있다'는 풍수가 김일룡의 말을 들은 광해군이 강제로 빼앗고 개조하여 궁궐로 만들었다. 이는 1617년의 일이다. 당시 광해군은 궁궐 공사에 거의 미쳐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어 형편이 궁핍한 와중에도, 궁궐 공사가 여러 곳에서 진행되었다. 불타버린 창덕궁과 창경궁의 복원에다, 새로운 인경궁의 건설, 그리고 경희궁까지. 임금의 어긋난 욕망에 민초들만 죽어나가는 현실이었다. 재정 고갈 탓에 당시 정부는 공명첩까지 팔아가며 공사 비용을 마련해야 했다. 음양술과 풍수를 신봉하던 임금의 눈에는 공사로 인한 민초의 고통이 보이지 않았던 건지. 이렇듯 경희궁은 유쾌하지 못하게 역사에 데뷔한 것이다. 


 경희는 훗날에 새로 지어진 이름으로, 원래는 경덕궁이라는 이름으로 지어졌다. 광해군은 정작 이 경덕궁에서 거주하지는 못했다. 그의 거주를 막은 것은 다름 아닌 원래 집주인 정원군의 아들인 능양군이었다. 집까지 뺏기고, 동생까지 역모로 몰려 억울하게 죽고, 아버지도 화병으로 죽는 등 원한이 많이 맺혔을 우리의 왕손 능양군은 야당 신세였던 서인과 손잡고 숙부 광해군을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킨다. 쿠데타의 결과는, 임금의 교체였다. 바로 능양군이 16대 임금 인조이다. 경덕궁은 결과적으로 원래 주인에게 돌아간 셈이다. 원래 주인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왕기가 서려있다는 예언까지 증명하며 왕족의 집에서 궁궐로 승격했다. 이렇듯 경희궁은 인조반정이라는 조선사의 격동을 몰고 오며 역사에 등장했다.


 이와 같은 경희궁의 연혁을 떠올리며 정문인 흥화문(興化門)을 통과하여 경희궁에 들어갔다. 흥화문에서 숭정문까지의 공간은 텅 비어있음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버려진 궁'다운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전각이 거의 헐리고 흥화문의 위치도 원래와 다른 탓에 이와 같은 썰렁함을 연출하게 된 것이다. 허전한 길을 걸으며 이윽고 숭정문으로 들어가 궁의 중심인 숭정전을 바라보았다.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


 궁궐의 중심건물을 정전이라고 부른다. 경희궁의 정전은 바로 숭정전이다. 숭정전은 광해군 시절 공사 때 이미 지어진 전각으로, 계속 경희궁의 정전으로서 기능해왔다. 경희궁은 인조 이래로 창덕궁과 함께 양대 궁궐을 이루었다. 창덕궁이 동궐, 경희궁이 서궐이었다. 조선 후기의 왕들 대다수가 경희궁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정조가 즉위한 곳도 바로 숭정전 앞의 뜰이다. 이렇듯 숭정전은 조선 후기 정치의 중심적인 장소로서 기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희궁의 낮은 인지도가 무색하게, 숭정전은 대중에게 많이 노출되는 전각이다. 많은 사극에서 조선시대 왕궁으로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후술 하겠지만, 복원된 건축물인 탓에 훼손 등의 염려가 덜한 탓에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가을에 찾은 숭정전은 시원한 바람과 함께 방문객들을 맞이했다. 나는 왼쪽 행각을 따라 걸으며 숭정전을 감상했다. 기분 탓인지, 굉장히 적막한 분위기를 느꼈다. 고궁은 적막하면서도 장엄한 매력을 갖추고 있는 것 같다. 이래서 고궁을 향하는 발길을 못 끊나 보다.


 위의 사진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숭정전의 좌우 행각은 높이 솟아 있다. 아마 지대에 맞추어 저렇게 지은 모양이다. 이는 다른 궁궐의 정전들과는 구별되는 특징이다. 이 점 외에도 숭정전은 다른 정전들과 결정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난다. 위에서 짧게 언급했듯이, 숭정전은 새로 복원된 건물이다. 완공 연도는 1994년이다. 나머지 네 궁궐의 정전은 모두 조선 왕조 치하에서 지어진 상태로 보존되어 왔다. 처음 그대로인 창경궁 명정전을 제외하면 , 나머지 정전들은 조선 멸망 전에 복원되었고 현재까지 이른다. 우리가 보는 경희궁의 숭정전은 불과 서른 살도 되지 않은 셈이다. 숭정전만이 아니다. 우리가 보는 경희궁의 전각들은 전부 현대에 들어와서 복원된 것이다. 그 탓에 전각들 중에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하나도 없다. 경희궁 자체도 '경희궁지'라는 이름으로 사적에 등록되었다. '버려진 궁'이라는 타이틀은 어떻게 보면 딱 들어맞는 말이다.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쓰이는 원래 숭정전


 사실 원래의 숭정전은 아직 현존하고 있다. 꼭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던 나는 경희궁 답사로부터 몇 개월 지났을 때, 동국대학교로 향했다. 위의 사진은 동국대학교에서 정각원으로 쓰고 있는 건물이다. 이게 바로 원래의 숭정전이다. 한일병합 이후, 일제는 경희궁에 남아 있던 전각들을 매각하고 그 자리에 일본인 학교를 세웠다. 이 과정에서 숭정전은 조계사로 팔려갔고, 경희궁의 정문 흥화문은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인 박문사의 정문으로 팔려갔다. 조계사는 동국대학교를 개교하면서 숭정전을 이전해 정각원으로 쓰기 시작했고, 이는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이렇듯 망국을 겪으면서 왕조의 유산은 대학의 부속건물로 변모하게 되었다. 동국대에서 본 숭정전의 모습은, 비록 제자리에서 멀리 떠나왔지만 여전히 궁궐의 정전으로서의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화려한 단청과 같이 딸려온 답도는 자신이 궁궐의 건물로 지어졌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경희궁의 수난사는 조선 후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을 시작하면서, 경희궁의 전각들은 헐려 경복궁 전각의 자재로 사용되었다. 경희궁은 일제강점기도 되기 전에, 이미 그 주인인 조선 왕실에 의해서 버려졌던 것이다. 경희궁이 일제에 의해서 훼손되었다고만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꽤 놀라운 사실이 아닐까 싶다. 경희궁은 이미 조선 왕조 때부터 '경희궁지'였던 것이다. 실제로 구한말에는 경희궁이 궁궐이 아닌 창고 혹은 국가 행사장으로 쓰였다. 어찌 되었든 일제의 훼손도 결코 틀린 말은 아니다. 남아있던 숭정전을 매각하고, 흥화문을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의 출입문으로 사용한 것은 명백히 우리의 역사성을 훼손하고 욕보인 것이다. 다만, 흔히 알려진 사실과는 꽤 다르다는 것을 아는 것도 중요하다고 느꼈다.


 



숭정전의 계단에 올라서서 바라본 풍경. 현대의 건물과 고궁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궁을 거니다가, 숭정전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문득 멈춰 서서 뒤를 바라보니 행각의 가와 너머로 현대에 지어진 빌딩들이 보였다. 같은 푸른 하늘 아래 한눈에 들어오는 왕조의 궁궐과 현대의 빌딩들. 어울리지 않는 조합으로 생각될 수도 있겠으나, 꽤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왕족이 살지 않는 고궁은 시민들에게는 좋은 산책로이자 배움터이다. 번잡한 시내에 이와 같은 휴식처가 있다는 것은 매우 기쁘고 축복받은 일이다. 나처럼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에게는 이보다 좋은 곳이 없을 것이다. 경희궁은 비록 규모가 작고 새로 복원되어 역사성은 낮지만, 그만의 매력을 가지고 있다. 남아있는 전각이 거의 없는 현실에서 오는 쓸쓸함과 적막함이 그만의 특색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다른 궁궐과 다르게 관광객이 적어, 천천히 조용하게 둘러보고 싶은 사람에게는 딱 알맞은 사적이라고 생각한다.


서암. 본래 왕암이라고 불린 것을 숙종이 서암이라고 명명했다.


  영조 임금의 어진을 봉안하던 태령전의 뒤편에는 매우 비범해 보이는 바위가 있다. 일명 '서암'이라고 한다. 본래는 왕기가 서린 바위라는 뜻에서 '왕암'이라고 불렸으나 숙종이 상서로운 바위라는 의미로 '서암'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름 그대로 상서로워 보이는 바위였다. 이만한 거석이 상서롭지 않다면 뭐가 상서로울지 생각이 들었다. 알면 알수록, 정원군의 집터에 왕기가 서려 있다고 예언한 풍수가 김일룡이 정말 용하다는 생각이 든다. 인조가 왕이 된 것을 보면, 결국 현실이 되지 않았던가. 광해군 이후의 왕통은 모두 인조로부터 나왔다. 이런 것을 보면, 경복궁을 복원한다고 경희궁을 버린 대원군이 참 용타는 생각이 든다. 경희궁을 버린 죄로 조선 왕조가 망하지 않았나 하는 우스운 생각을 하면서 경희궁을 나왔다. 


 


 두 해 전 가을의 경희궁 답사는 여기까지이다. 서두에서 요즘은 경희궁을 많이 아는 것 같다고는 했지만, 주변을 보면 여전히 인지도가 높지는 않은 것 같다. 생각해보면 그럴 만도 한 게 이미 일제 이전에 조선 왕실이 버린 궁 아닌가. 근래 듣자니 경희궁을 복원하자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고 한다. 난 개인적으로 복원은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한다. 경희궁은 없어지고 흔적만 조금 남은 것으로 역사에서 그 역할을 다한 것이다. 굳이 복원을 하는 것보다는, '버려진 궁'으로서 우리에게 남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경희궁을 복원하는 것이 역사성을 높이는 데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는다. 누군가는 썰렁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현재의 경희궁이 좋다. 이 적막함은 은퇴한 궁궐이 내뿜을 수 있는 특권이다. 나처럼 경희궁을 사색과 조용한 관람을 위한 장으로 쓰는 것을 나지막이 권해본다. 버려진 궁,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휴식처로서 버리지 않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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