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가 원하는 소명은 경쟁에서 알 수 없다!
공들이 모여 신세 한탄을 했다. 배구공이 “나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는지 매일 귀싸대기만 맞고 산다.”고 하니, 축구공이 “넌 다행이다. 난 맨날 발로 까여 머리로 받친다.”라고 했다.
그러자 탁구공이 “난 밥주걱 같은 거로 때리고, 깎고, 돌리고, 올리고, 정신없이 쥐어 터지는데 아주 죽겠어.”란다. 테니스공은 “난 흙바닥에서 굴리다가 어떤 땐 시멘트 바닥에서 털이 다 빠지도록 두들겨 맞는다.”, 야구공도 한마디 거든다. “닥쳐라. 난 매일 몽둥이로 쥐어 터진다.”라고 했다.
이 넋두리를 힘없는 눈으로 말없이 쳐다보고 있던 골프공이 한마디 하자 모두가 조용해졌다. 골프공은 “너희들, 쇠몽둥이로 맞아봤냐?” 목사님과 성경공부 하면서 들은 이야기다. 각자의 역할이 있다는 주제였다.
청소년이 학업에 대해 어려움 이야기했을 때 어른 중 골프공의 이야기를 한마디씩 하는 이들이 있다. 대충 이런 거다.
“나 학교 다닐 때 지금의 너 때처럼만 해 주었으면 서울대 열 번은 갔겠다.”
청소년이 힘겨운 이야기 했을 때 골프공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 어른도 있다. 나는 예전에 어렵고 결핍된 환경에서도 잘 성장해 왔는데 너의 풍족한 환경에서 무엇인들 못 하느냐는 말이다. 유행하는 자기계발서에서도 비슷하게 성공을 주장한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결핍과 고통은 도약의 발판이고 예전에 성공했던 사람들도 모두 그러한 문제와 힘겨움을 이겨 내고 경쟁에서 승리했다는 것.
철저히 개인이 가진 환경의 어려움을 자신이 모두 이겨 내야 할 문제로 치부한다. 네 문제는 당연히 네가 해결해야 하며 사회적 힘겨움은 너의 성공을 담보하는 중요한 기재라는 것이다.
학교와 관련기관에서 유명인이라면서 강사로 세웠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자신이 “청소년기에 나만큼 고생한 사람 없더라.”는 주장을 펴면서 강단 아래에 있는 학생들에게 너희들 힘겨움은 아주 작다면서 나도 이렇게 무지막지한 어려움을 잘 이겨 내서 좋은 대학 갔고 성공했는데 그 정도도 못 이기느냐며 소리친다. 청소년기 힘겨움은 쉽게 이겨 내야 한다며 다그치는 듯한 말을 지겹게 들어 왔다.
현재 우리나라 자살률은 OECD 국가에서 1위다. 청소년의 사망원인 1위 또한 교통사고나 암과 같은 질병이 아닌 자살이다. 70~80년대 자살하는 청소년들이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된 적은 없었다. 요즘 목숨을 던질 만큼 아프고 힘겨운 청소년들이 많은 게 사실이다.
자기계발서에서 주장하듯 단단해지기 위해서는 경쟁에서 이겨 골프공이 되어야 한다고만 안내하는 이들이 많다. 이들은 부조리한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모두 자신의 문제로 환원해 버린다. 그 순간 함께 해결해야 할 근본적인 사회적 문제는 정치인이나 힘쎈 어떤 이들이 해결해 주는 문제가 되면서 등한시하게 된다.
개인이 성찰해야 하는 정치, 사회, 교육 등의 본질적인 사회 환경에 대한 가치들은 자신과는 관계 없는 일이 된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은 이미 구축된 것이고 그 안의 경쟁에서 이기는 문제에 집중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내가 탁구공인지 야구공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탁구공의 규칙과 골프 규칙도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골프공과 같이 다른 공에 비교해서 강하고 멀리 나가는 강한 공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만 같다. 심지어 우리 사회는 탁구공, 야구공, 골프공을 뒤섞여 있는데 승리의 규칙은 골프와 똑같이 만들어 놓고(사회문제) 골프채로 스윙연습(개인역량)만을 열심히 하라고 한다.
최근 ‘공정’이라는 화두가 여기에 놓여 있다. 이미 구축해 놓은 경쟁체제 규칙을 거스르면 그것은 공정을 깨는 나쁜 행위다. 예를 들어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바꾸는 일은 불공정에 해당한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이 역량이 같고, 같은 일을 하면서도 비정규직이 임금이 작은 것도 당연하게 본다.
직장에서 같은 일을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정규직이 시험을 보고 입사했듯이 무조건 입사시험과 같이 모든 이들이 똑같이 시험과 같은 경쟁에서 통과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를 공정으로 이해하고 있다. 대학 수능시험 또한 비슷해 보인다. 학교에서 교육하지 않는 문제가 나오는 등 수능의 수많은 불합리한 문제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시험의 규칙에 따르고 있는지 따르지 않는지가 중요한 일이다.
사회 구조적인 불평등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경쟁에서 줄 세울 수 있는 규칙을 중요시하면서 역설적으로 ‘공정’이라는 가치가 기존의 경쟁규칙을 강화하면서 ‘불공정’을 강화하는 기준으로 활용된다.
강연에서 주장하는 자기 계발이 성공할 가능성이 있는가? 천편일률적인 성공이라는 화두를 가진 강연의 패턴이 있다. “힘겹고 어려운 일들이 많았지만 잘 이겨 내서 경쟁에서 승리해서 성공한 지금 이 순간의 내가 있다. 여러분도 자신의 아픔과 힘겨움을 견디고 이겨서 나와 같이 행복한 꿈을 가졌으면 좋겠다.” 경쟁에 이겨서 단단한 골프공으로서 역할을 잘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개별 능력이나 조건은 모두가 다르다. 그 다름과 그가 싸여 있는 환경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한 두 가지 규칙을 정하고 그곳에서의 경쟁에서만 이길 수 있다는 자기 욕심과 욕망을 부채질하는 책과 강연들은 일종의 자기 착취다. 배구공, 축구공, 탁구공 등 모두가 자기 위치에서 열심을 내고 있고 힘들고 아픈 일이 있다. 누구에게나 아픔은 아픔이다. 배구공이나 탁구공도 아픈데 너는 골프공 수준은 되어야 한다면서 골프공의 단단함을 요구하며 환경을 바꾸지 않는다. 배구공은 배구장을 마련해 주어야 하는데 말이다.
테니스공을 골프공으로 사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테니스공은 그 자리에서 박살이 나고 만다. 좋은 세상이란 자신이 테니스공으로서의 내구성과 역할을 찾아가며 테니스장에서 활동하도록 돕는 것이지 골프공이 강하다면서 너도 쇠몽둥이로 맞아도 견딜 수 있어야 한다고 테니스공을 윽박지를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골프공으로 테니스를 칠 수 없는 이유다. 테니스공은 테니스 코트에서, 탁구공은 탁구대에서, 야구공은 야구장에 있어야 한다. 골프장에 모두 밀어 놓고 나도 이만큼 힘들게 성장했다는 헛소리는 그만해야 한다. 무조건 오지선다형 시험이 공정을 보장한다는 망상도 깨져야 한다.
거북이가 토끼를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해서 걷고 또 걸어서 결국은 토끼를 이겼다는 동화 속의 이야기를 듣고 살아왔다. 이런 망할 놈의 이야기를 교훈 삼을 게 아니다. 땅에서는 거북이가 토끼에 비해 느리지만 물속에서는 토끼는 한 발짝도 못 가고 빠져 죽는다.
토끼와 거북이를 경쟁시켜서 너도 저런 거북이가 되라고 주장하는 것은 나는 탁구공인데 너는 골프공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과 같다. 그때 잠을 잔 토기는 한 마리다. 이후에 토끼가 잠을 잘 확률은 거의 없다.
공정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토끼와 거북이 모두 육지에서 달리기하고 물속에서도 경쟁하는 게 맞다. 탁구공에게 내가 어렸을 때 조금만 더 담금질했으면 골프공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 거북이가 경쟁에서 승리했으니 너도 가능하다고 설득할 일이 아니다.
토끼와 거북이라는 동화에서 우리가 성찰해야 할 일은 거북이가 토끼를 이겼다는 결과가 아니다. 거북이는 육지에서도 걸어 다닐 수 있는 동물로 열등감 없이 육지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을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과정, 자신에게 집중하고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탁구공이 우연히 골프공 보나도 더 멀리 날아갔다는 웃기지도 않은 결과는 신경 쓰지 않아야 한다.
자아가 원하는 소명은 경쟁에서 알 수 없다. 경쟁은 나를 보는 일이 아닌 항상 타자를 보고 그를 이기기 위한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려는 노력이 자아를 알아 가는 과정인데 타자를 기준으로 경쟁에서 이기려는 노력만 할 때 자아가 원하는 일을 알기 어렵다. 자아를 알기 위해서도 그가 속한 환경의 규칙은 한쪽에게만 유리한 달리기가 아닌 ‘공’에 맞추어져야 한다.
자기 계발 강연, 신앙 간증, 몇몇 강사들의 과거 힘겨움을 과장하며 이겨 냈다면서 아픔과 슬픔이 승전보의 토대였다는 그 많은 자기 힘겨움 그만 들이대야 한다는 말이다. 그는 이미 골프공이었고 골프공의 역할을 했을 뿐이다. 배구공이나 탁구공이 아파하면 그것을 이기고 골프공 되어야 한다고 할 게 아니고 이들의 아픔을 함께 공감해 주면 좋겠다.
너는 배구공이며 탁구공이라고 당당히 주장하며 내 할 일 잘하면서 나와 같은 아픔을 똑같이 이겨 내라고 강요하지 말고 청소년의 아픔을 끌어안아 주는 이웃이어야겠다. 청소년은 승리한 거북이의 결과와 골프공의 단단함에 현혹될 이유가 없다.
내가 어떤 공인지 자신의 경험을 넓히고 관찰하는 시간이 더욱 많아져야 한다. 타자가 아닌 나를 더욱더 들여다 보아야 한다. 나를 감싸고 있는 환경을 해석하고 규칙이 올바른지 살피면서 경쟁의 판에 매몰되지 말고 불공정한 판을 바꿀 수 있는 시민이 되려는 노력이 필요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