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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입만산 Mar 01. 2023

교사도 신념을 가르쳐야 한다

'자기 진실성'이 낳은 불행한 사회



1. 진심에 대해서


 지난해 필자의 수업 중 성소수자를 연상시키는 내용이 등장했다. 아이들은 낄낄대며 그 '비정상'에 대한 불쾌한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가만히 있을 수 없던 필자는 잔소리를 좀 했다. 그러자 똘똘한 녀석 한 명이 이렇게 말했다.



싫은 걸 어떡해요? 제 감정은 제 자유 아닌가요?



  참 꼴 보기 싫은데 할 말은 없더라.



 

  필자도 어릴 적에는 은근 별로인 학생이었다. 뭐랄까? 조금 삐딱하고, '진정성' 같은 걸 믿지 않는 아이였던 것 같다. 6학년 때 장래희망 칸에는 '공무원'이라고 담백하게 적어 제출했는데 선생님께서는 부드러운 말씀으로 고쳐 적길 권유하셨다. 하지만 나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 결과, 필자의 초등학교 졸업앨범 소개란에는 '행복한' 공무원이라는 원치 않던 수식어가 함께 붙어있다.


그때는 왜 삐딱했을까? '아픈 사람을 치료할 수 있는 의사', '사회를 안전하게 만드는 경찰' 등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많은 직업들에 비하면 '공무원'이라는 꿈이 꽤나 '무미건조'한 건 사실이지 않은가? 아, 그렇다고 공무원이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니다. 당시의 나 역시 단순히 '안정적'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것을 선택했었으니까. 필자의 선생님께서도 그 점을 인지하시고 수정을 제안하셨던 게 틀림없다.


 그러나 사실 필자가 '공무원'이라 적은 이유 역시 그것이 무미건조했기 때문이다. '공무원'은 그것이 내 꿈이라 말할 때 그 누구도 헛되다거나 이상적이라 비웃지 않을 그런 단단한 '진심'처럼 보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 어릴 적 필자는 여러 가치나 신념과 같은 허구적인(?) 것들을 품었다가는 그것이 쉽게 부서질까 두려웠던 것 같다. 지금으로 말하면 '쿨병'이 있었던 것이다.

 *쿨병: 다른 이들의 꿈이나 신념 등을 낮잡아보며 스스로는 그것에 구속받지 않는 척하는 경향




2. 자기 진실성과 허무


 철학 용어 중 '존재의 거대한 고리'라는 말이 있다. 인간을 포함한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의 고리에 연결되어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상으로 근대 이전 사회에 존재했던 생각의 방식이라고 한다. 대표적으로 신에 의해 모든 것이 탄생되고 영향받는다는 개념이 이에 해당하고, 동양 문화권에 익숙한 왕의 부덕이 역병을 불러온다거나, 자식의 효성에 감복한 하늘이 부모의 불치병을 낫게 하는 등의 이야기들 역시 이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권리가 크게 부각되고 자연과학이 대두된 근대 이후, 이 사상은 매우 옅어졌다고 한다. 소위 '형이상학'적이라 표현되는 모호한 가치들이 비판받고 사장되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것을 '신이 죽었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물론 우리를 둘러싼 이 거대한 고리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민족에 대한 사랑'으로, 또 어떤 때에는 '국가에 대한 충성'의 모습으로 이 고리는 집단에 대한 헌신적 가치들로 변화해 왔다. 하지만 더욱 실증적이고 개인주의적으로 변화해 온 우리는 이들이 가진 모호성까지 모조리 파악하여 끊임없이 비판해 왔고 현대에는 이마저도 대부분 파괴된 듯하다.


 그렇게 모든 고리가 사라진 가운데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가치는 '자기 진실성'이다. '나' 자신에게 진실한 것이 바로 가치 있는 것이라는 이 생각은 공공의 가치 대부분이 무너진 현대사회에서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스스로에게 솔직해져 보라는 즉석만남 어플 광고', '자아실현을 크게 강조하는 교육의 흐름'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게 우리 대부분은 내 속에 있는 것만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이라 무의식적으로나마 믿고 있다.


 그런데 자기 진실성의 가치는 종종 도덕적 가치와 충돌한다. 자기 진실성이라는 개념이 '나' 외부의 모호한 가치들을 비판하며 생겼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당연하다. 더군다나 스스로에게 솔직해졌을 때 많은 사람들은 무엇보다 '자기 이익'이나 '감정'과 같은 가치를 먼저 인식하게 되는데 이것들이 타인을 배려하기보다는 자기중심적인 가치들임은 분명하다. 결국 어떤 부분에서 자기 진실성은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를 옹호하는 듯하다. 이 점에서 내 속에 있는 것들이 진정으로 치 있다는 현대의 흐름은 모든 가치들을 부정하는 허무주의로도 향할 수 있다. 1에서 언급한 소수자에 대해 혐오를 정당화하는 학생이나 이타적인 직업이 조롱당할까 두려워 공무원을 적은 어린 필자 역시 이에 따른 부작용이 아닌가 싶다.


 자신 속에 실재하는 가치를 찾고자 하는 자기 진실성이 허무주의를 낳는다는 것은 너무나 역설적이다. 모든 가치들이 사라진 허무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찾을 수 있는 가치는 아마 내 육체를 편안하게 할 수 있는 물질적 이익뿐일 것이다. 그러나 물질에서 유일한 가치를 찾을 수 있는 삶이야 말로 진정으로 끝없이 허무한 삶일 것이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를 무의미로부터 구해낼 각자의 신념과 가치가 필요하다. 비록 그것이 허구적일지라도 말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우리 인간은 행복한 삶을 위해 각자의 신념과 사상이 필요하다.




* 맹목적인 신념  아니 세뇌교육은 당연히 위험하겠지






* 본 글은 실천교육교사모임을 통해 필자가 2023.01.11. 에 포스팅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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