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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지선생 Feb 13. 2020

기억이라는 고통에 대해..

앤드류 포터,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1.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에서 스토너는 자기 딸과 서재에 앉아 오래 책을 읽는다. 스토너의 어린 딸은 그런 아빠의 곁에서 조용히 자신의 책과 시간을 보낸다. 이 무료하고 조용한 ‘풍경’을 기꺼이 평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우리의 스토너에게 이 평화는 오래 주어지지 않는다.

존 윌리엄스, ,<스토너>

그 시간과 공간을 온전히 ‘스토너’만의 시간과 공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 시간과 공간은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과거의 것이 된다. 우리는 어쩌면 모두 과거라는 납치범에게 기억을 인질로 붙들린 채 고통스럽게 미래를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냉혹하게 말하자면 달콤한 과거는 없다. 모든 과거는 미래에 비추어 훗날 추인되는 시간의 파편일 뿐 아닌가. 당신이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현재는 고통이 되고, 과거는 유토피아처럼 반짝거리겠지만, 우리는 과거로 갈 수가 없다. 그러니 과거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오늘을 추궁하고 내일을 강요하는 고통스러운 협박자나 다름없다.

스토너의 평화가 우리에게는 빛나는 아름다움이겠지만, 스토너에게는 평생 다시 만나지 못하는 고통스러운 순간이듯.

 

2.

포터의 소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서도 시간은 잔혹하다. 시간은 인물들을 계속 떠민다. 그들은 시간에 휩쓸리지만, 안간힘을 다해 과거를 붙잡는다. 아니, 그들이 아니다. 헤더다. 헤더와 로버트 이야기다.

헤더와 로버트는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미국판

“우리를 배신한 스러진 사랑들, 우리가 배신한 스러진 사랑들, 추억하기조차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유년의 순간들.”(106쪽)  

을 이야기했다. 그게 다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헤더에게는 이게 다다. 그리고 배신과 수치(그리고 상처)를 고백하고, 그 기억을 공유함으로써 그들은 더 비밀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시간을 회상하노라면, 나는 우리 사이의 일들이 끝나기 직전의 어느 날 저녁으로 돌아간다.”

헤더는 늘 고통스러울 것이다. 잊고자 하였으나 잊을 수 없는 “어느 날 저녁” 때문이다.

결코 다른 사람에게는 닿을 수 없는 내밀한 기억. 그런 비밀스러운 일들이 고백되는 순간들에 대해, 그리고 그런 경험이 가져다주는 비정함에 대해 헤더는 내내 생각해야 할 것이다.






3.

나는 이 이야기가 윤리적으로 딜레마에 갇힌 여성의 이야기로 읽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윤리적 고민이라기보다, 존재론적 고민에 더 가까운 것으로 읽힌다. ‘늙음’이 주는 현명함과 편안함, 대조적으로 ‘젊음’이 주는 달콤함과 열정. 그 사이 어느 것도 선택하기 어려운 헤더의 입장에 대한 이야기로 읽히는 것이 오히려 타당해 보인다. 죽음에 더 가까운 로버트보다, 아직 생의 가혹함이 기다리고 있는 콜린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건 당연한 귀결처럼 보이며, 우리가 그녀의 선택에 대해 비난할 수 없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헤더가 자기 또래의 학생을 내려다보며 그들이 자신보다 어려 보인다는 착각에 빠지는 것도, 곧이어 그곳에서- 암시적으로- 헤더가 로버트와 같은 늙음과 죽음이 기다리는 세계에 이끌려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그 장면에서, 우리는 헤더가 로버트를 떠나야 하는 이유를 알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

이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이 전달하는 정서는 묘한 비애감을 준다.

다른 이야기에는 첫 부분에 일어나야 할 일이 이 이야기에는 마지막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는 오디세이의 이야기를 거꾸로 시작하는 것과 마찬가지. 오디세이와 그 후예들이 익숙한 곳을 떠나 위대한 여정을 마친 후 다시 돌아오는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사이, 헤더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여정을 시작하면서 끝맺는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이렇게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결국에 나는 (그 집을) 떠나야 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  - 우리는 저 괄호 안에 각각 다른 단어를 집어넣을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곁을, 이곳을, 이 시간을 등등.


Finally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eventually로 끝나는 이야기.

첫 문장 : IT wasn't until the last day  of the fall semester that Robert finally spoke to me.


마지막 문장 : And it was a strange moment, sitting there in the dark, drinkin Robert’s wine, realizing that eventually, maybe not for a few hours, but eventually, I would have to leave.

5.

제목인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이 뭘까.

물리학적으로는 빛이 반사되거나 투과되는 과정의 예측 불가능성을 말한다고 하나, 이 복잡한 제목에 물리학적 의미까지 부여할 필요가 있을까. 그저 우리에게 ‘빛’은 찰나의 순간이고, ‘물질’은 눈 앞에 현존하는 영원해 보이며 만질 수 있는 감촉의 존재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찰나로 보였던 빛은 사라지지 않지만, 물질은 사라진다는 것을 말이다. 시간을 초월한 빛 앞에서 시간 앞에 무력한 물질을 대비한 이 잔혹한 대비는 ‘시간’이라는 형벌을 받는 모든 존재에게 던지는 역설적인 위로다.

만약 이 소설을 읽고 참을 수 없는 슬픔이 밀려온다면, (다른 수많은 이유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헤더와 우리가 잃은 것을 공유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헤더가 잃은 것은 로버트가 아니라, 그의 수치와 부끄러움, 혹은 도저히 타인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나’를 내비쳐도 괜찮았던 ‘시간’과 ‘공간’ 그리고 ‘어떤 사람’이다. 연인일 수도 친구와 같이 당신을 환대하며 맞이했던 어떤 존재들일 것이다.  어쨌든 그 빛은 지금 당신 앞에 없다. 그리고, 우리는 내일을 향한 여정을 지속해야 한다. 슬프지만 그렇다.



6.

스토너는 어땠을까. 그 역시 그렇게 과거를 그림자 삼아 앞으로 나갔고, 결국 그를 기다린 것은 고독한 죽음이었다. 우리라고 다를까.

그래도 그 그림자를 이 소설의 제목처럼 ‘빛’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영화 <밀양>의 마지막 장면

포터의 소설 <머킨>과 <폭풍>은 기억의 순간을 ‘치유’로 바꾸는 소설이다. 언제든 우리를 후회와 회한, 그리움으로 처넣는 기억들이 가끔은 오늘의 삶을 안아줄 때가 있다. 비록 다시 돌아오지 못할 시간일지언정, 한순간만이라도 위안이 필요한 순간은 있는 법이고, 어떤 기억들은 ‘추억’이 되어 오늘의 우리를 감싸 안는다. 이 두 소설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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